ADVERTISEMENT

진보·보수서 ‘공공의 적’ 협공 받는 장하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화합하기 힘든 두 그룹. 국내 진보와 보수 경제학계를 두고 지식인들이 즐겨 하는 말이다. 세계관과 개인적 경험, 정책적 처방 등 어느 하나 닮은 점이 없어서다. 이런 두 진영이 최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경제학자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마치 좌우파 연합전선을 펴는 듯하다. 그 상대는 출판 4개월도 되지 않아 40만 권 가까이 팔려 나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지은이 장하준(48·사진)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다.

좌우 양쪽의 비판에 대해 몇몇 경제 전문가는 “해방 이후 처음 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금융가인 여의도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국내 좌우파 경제학자들이 장하준을 잡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은 듯”하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왜? 무엇 때문에? 지식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장하준 논쟁’을 들여다본다.

◆좌우 연합 공격=첫 화살은 좌파 쪽에서 날아들었다. 지난달 말께 좌파 성향의 경제학자인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창작과비평 주간논평’에 “장 교수가 서구 비주류 학계의 시각을 한국 사회에 마구잡이로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좌파 성향 경제학자인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한 인터넷매체에 쓴 칼럼에서 “장 교수가 한국의 재벌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요지로 비판했다.

 대표적 우파 진영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KERI·한경연)은 이달 7일 ‘계획을 넘어 시장으로-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견해’라는 ‘장하준 비판 보고서’를 내놓았다. 한경연의 송원근 금융재정연구실장은 “장 교수가 정부 주도의 암묵적 계획경제를 지지하는데,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주장했다.

 좌·우파가 한목소리로 공격한 대목도 있다. 양 진영은 “장 교수가 아프리카 빈곤 문제나 미국 자동차회사 GM의 파산 원인을 분석하면서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 반박=좌우 연합 공격에 대해 장 교수가 중앙SUNDAY(2월 13일자 6∼7면)와 단독 인터뷰에서 말문을 열었다. 영국에 있는 그는 11일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 군부독재가 남긴 고질병인 극단적 이분법으로 나를 재단하고 있다”며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한국에선 내가 불편한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진보·보수 진영은 내 말을 무리하게 확장해석하고 있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면 ‘장하준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지지한다’고 공격하거나, 재벌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면 ‘장하준은 재벌체제 지지자다’고 비판한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내 말을 극단적으로 늘려 해석하고 있다. 내 논리가 무슨 엿가락인가.”

 장 교수는 자기 정체성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너무 단순화한 것일 수 있지만 ‘정부 개입 vs 시장 자유’를 기준으로 보면 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좌파”라며 “하지만 ‘급진적인 변화 vs 점진적 개혁’이란 잣대로 보면 나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니 우파고, ‘자본 편인가 vs 노동 편인가’를 기준으로 보면 나는 양쪽이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중도파”라고 선언했다.

◆“경제 전문가들, 대중과 대화에 실패”=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장 교수가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사실관계와 맥락을 아주 단순화해 책을 쓴 듯하다”며 “이 점을 감안하지 않고 대중적인 책을 학술논문 대하듯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현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를 먼저 인정할 것도 주문했다. “경제를 분석하는 방법은 수십, 수백 가지”라며 “장 교수가 선택한 방법도 선진국에선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회학자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국내 경제 전문가들이 대중과의 대화에 실패하는 바람에 빚어진 현상”이라며 “경제학계는 좌우를 떠나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경제위기에 상처를 입는 대중의 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