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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다큐-7] 낡은 사진 한장 달랑 들고, 처녀들 태평양 건너와…사진결혼

미주중앙

입력

무척 드문 일중의 하나이지만 이들 3명의 사진 신부들은 한 마을에 살았던 친구들이다.

◇홀아비만 득실하는 한인사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홀아비만 많이 왔어요. 또 여자들은 한 3백 여명 왔는데 대부분이 남편과 같이 온 나이든 아주머니들이어서 출산할 나이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딸들은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어서 결혼할 적령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와이의 한인수가 자꾸자꾸 줄어들었어요. 영감들은 다 죽고… 그런데 지금 하와이에 한인들이 수천명이 살고 있어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느냐? 그 이유는 '사진결혼' 때문입니다. 사진결혼으로 짝이 지어져 결혼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그래서 명맥을 이어왔을뿐 아니라 번성하게됐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림없었습니다."

하와이 초기 이민의 특징은 그 출발이 정착 이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애초부터 그들은 낯설고 물설은 하와이에서 살고 싶지가 않았다. 몇년 동안만 고생하고 그렇게 해서 번 돈을 고국에 가지고 가려했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집도 사고 논도 사서 편안히 살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벌지 못했다. 그래서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도 귀국한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인들은 망설이는 동안에 한일합병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갈 곳도 없다고 생각했다.

◇한인 7천명중 처녀는 10여명

그렇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 7천여명의 한인 이민 가운데 부녀자는 불과 5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그 가운데 결혼할 수 있는 처녀는 몇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해결할 방법이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1977년) 79살 김영진 옹의 얘기다.

신랑 이대순(1905년 이민)과 신부 차순남(1915년 하와이 도착)의 결혼사진.

한국사람들은 아들 딸 누구든 타국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싫어 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금지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여기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홀아비들이었습니다. 내가 공부할 때를 생각해보면 학교에 한국사람이라고는 통털어 3-4명 정도에 불과했어요. 그 나머지는 모두 타국사람들이었죠. 그러니 어디로 갑니까? 별 수가없는 것이지…"

정말 별 수가 없었다. 농장의 노동도 고됐지만 아늑한 가정생활을 그리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술을 마셨고 노름을 했고 아편을 했다.

◇농장주들이 사진혼인 주선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하와이 농장의 주인들이 난처하게 됐다. 더구나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고 탈선하는 비율이 높아지자 전체적인 일의 능률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홀아비들이 희망이 끊어지니까 그때는 뭐 술도 먹고 아편도 하고 놀음도 하고… 그러니까 사회 기강이 서지 않고 문란하게 됐고 그리고 물론 농장일도 큰 지장을 받았겠죠. 그래서 사탕농장주들이 의논해서 짜낸 묘책이 바로 '사진결혼'이었습니다."

사진결혼이 아메리카의 한국인들만 가졌던 특이한 결혼방식은 아니었다. 1세 동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본이민들이나 중국이민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방식을 이용 해 왔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로써 한인 사회에서 풀어지지 않았던 난제 하나가 실마리를 찾게 된 셈이다.

◇최초 사진결혼 이래수 최사라

김원용은 '재미한인 이민 50년사'에서 이런 방식으로 결혼한 맨 처음 축복받은 신랑은 당년 38세의 노총각 이래수씨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낡은 사진 한 장을 들고 남편 될 사람을 찾아 태평양을 건너온 신부는 23살 최사라양이었다.

그때가 1910년 12월2일이었다. 이들은 이민국에서 민찬호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다음해 39살의 노총각 백만국도 23살 유명선양을 똑같은 방법으로 아내로 맞아들였다. 바야흐로 노총각들의 장가 선풍이 일기 시작 한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 77살 김기열 할머니의 얘기다.

"한국 부인들이 있다 하면 노총각들이 우르르 몰려들지요. 그리고는 '우리 모두가 한국 여자들과 결혼할 마음이 있으니 우리가 원하는 여자들을 구해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하지요. 그러면 '우선 당신들의 사진을 가져오시오. 내가 그 사진을 친정 어머니에게 보내서 색시를 구해보겠다' 이렇게 시작이 되지요."

처음 하와이의 노총각들은 남편을 따라 들어온 부인들에게 10여 년전에 찍어 놓은 구겨진 사진 한 장을 내 밀면서 애걸을 했다. "아주머니 친정 동리에 색시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사진 결혼으로 들어온 부인들이 많아지자 이번에는 그 사람들을 통해 색시를 구하기 시작했다.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낸 당시 79살 이순도 할머니의 얘기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 교회에 다니는 아주머니의 따님이 먼저 사진결혼으로 하와이에 들어갔습니다. 그래가지고 연줄연줄 얘기를 해서 저도 들어 왔는데 집안에서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 데다가 결혼할 때 드는 돈이 엄청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럴 필요없이 하와이로 가겠다고 말하니까 막지를 않았습니다."

◇신부초청비 200불 농장주가 내줘

현규환의 '한국 유이민사'에는 당시의 신랑들이 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200달러의 여비를 보냈다고 기록돼있다. 한달 노동으로 18달러를 받았던 당시의 입장으로 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돈이었다.

김원용의 '재미 한인50년사'에는 농장주인들이 이 돈을 선불해 주었다고 돼있다.

결국 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신랑은 신혼 초부터 수년동안을 한 농장에서 피나는 노동을 해야만 했다. 물론 꿈에 부풀었던 신부도 그 날로 농장에 나가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지난해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육성증언이 담긴 방송제작분은 JBC중앙방송을 통해서 2월16일(수)까지 오전9시40분부터 20분간 방송된다.

정리=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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