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정성시(悲情城市) O.S.T.

중앙일보

입력

이제는 1996년, 89년작 대만영화 '비정성시'를 다시 본다.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2천년대 거장의 하나인 허우샤오시엔 감독? 세계 최고의 영화중 하나? 줄거리조차 이해를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에 쏟아지는 기존의 찬사 혹은 몰이해는 중요하지 않다. 자잘한 분석은 이제 그만, 시간이 없다.

'비정성시'가 주는 마음의 칼을 찾아라!

이 작품은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자막으로 문을 연다.

1948년 중국에서 패한 장개석이 대만에 정부를 설립했다라는 자막으로 문을 닫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역사로 문을 연다.

우리 역사를 연상시키는 대만 현대사가, 제주 4·3항쟁을 연상시키는 2·28항쟁의 추이과정이 배경에 깔려있다.

'비정성시'는 가족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문 안에는 인간의, 한 가족의 삶이 도도하게 흘러간다.

드라마의 중심에는 문씨 집안 형제의 3대에 걸친 슬프고도 꿋꿋한 가족사가 서 있다.

'비정성시'의 역사성과 생명력은 역사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그리지 않고, 먼저 인간을 묘사하면서 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이 드러나게
하는 과정에 있다.

감독 특유의 서정적이고도 호흡이 긴 카메라 리듬, 생략적인 심리묘사와 사건 전개, 음향 방식 등은 자신이 체험한 대지의 인간을 온
몸으로 기록하려는 시선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다.

진정한 인간주의야말로 역사성, 서정성과 만날 수 밖에 없다는 것, '비정성시'의 자궁 속에서 잉태된 감동이요, 가르침이다.

필자와 '비정성시'의 인연은 깊은 셈이다. 영화를 본 감동 때문에 대만을 여행했고 허우샤오시엔을 인터뷰했고, 급기야 대만영화에 관한
방송 다큐멘터리까지 만들게 되다니... 대만 영화인들중에 허우샤오시엔과 비슷한 "붕어빵"이 많다.

그 사람들은 틈만 나면 가족을, 사람을, 역사를 말한다. 게다가 그들의 대표작들도 어딘가 허우샤오시엔과 비슷하다.

주제는 물론 긴 호흡에 관조적인 카메라 시선 등 스타일조차 닮았다. 그래서 "장사"가 안된다는 점까지도.

하지만 그들은 허우샤오시엔의 붕어빵이 아니었다.
허우샤오시엔이야말로 대만인들의 삶과 역사 때문에 생겨난 붕어빵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풀지못한 과거의 숙제, 평생을 끌고 가야 할
희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힘이 있다.

서구의 고전적 영화형식과 대등하게 보편적 영화문법의 하나로 자리잡은 '비정성시'의 영화언어로 허우샤오시엔과는 다른 개인들의 삶을
담아냈다. 그들은 '비정성시'를 넘어선 것이다.

그래, 우리도 이젠 허우샤오시엔을 만날 필요가 없다! '비정성시'라는 성배를 찾아 떠날 이유도 없다.

이 땅 안에, 우리 마음 안에 허우샤오시엔이 있고, '비정성시'가 있다. '비정성시'는 바로 시선의 에너지요 힘이다.

자기가 선 땅을, 가족을, 자연을, 역사를 어떻게 제대로 응시하느냐의 미학이다. 자기가 살고 보고 느낀 것만큼만, 보고 느끼고 만들 수
있다던가...

'비정성시'는 우리에게 절규한다. 두 발로 대지를 굳게 밟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당신의 삶과 역사를 응시하라고. 안이한 영화 습관,
잘못된 인생관을 잘라버릴 자객의 칼이 없이 영화를 보는 게 무슨 소용 이 있느냐라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