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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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소는 보통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천구(天球)의 적도 근처 28수(宿) 별자리 중 하나로서 우수(牛宿)라고도 한다. 『송사(宋史)』 『천문지(天文志)』는 우수가 “하늘의 관문과 다리[關梁]로서 희생(犧牲: 산 제물)의 일을 주관한다”고 전하고 있다. 우수를 견우(牽牛)라고도 하는데 칠월 칠석에 은하수 다리 건너 직녀를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소는 희생이다. 전국시대 제(齊) 선왕(宣王)이 흔종(叡鐘:제사)에 쓰기 위해 끌려가는 소가 떠는 것을 보고 양(羊)으로 바꾸라고 명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소는 노동이다. 우수 아래 하늘의 논밭인 천전(天田)을 경작한다. 살아서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제공한다.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智證王) 3년(502)조에 “처음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始用牛耕)”는 기록이 있지만 서기 1000년 전의 평북 염주군 유적에서 쟁기와 수레바퀴가 나온 것은 우경(牛耕)이 더 일찍 시작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강희맹(姜希孟)의 『금양잡록(衿陽雜錄)』에는 “삼월 보름에 땅을 갈 때 소가 없는 사람은 아홉 명을 고용해 쟁기를 끌어야 소 한 마리의 힘을 대신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12세기경의 고려에 대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 ‘거마(車馬)’조에 소달구지(牛車)가 나오듯이 운송도 맡았다. 인간이 노동에서 벗어나게 된 두 요소가 기계와 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소를 인간처럼 여겼다.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음덕(陰德)’조에는 황희(黃喜) 정승이 두 마리 소를 모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나은가’라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야 귀에 대고 ‘저 소가 더 낫다’면서 ‘가축이지만 마음은 사람과 같으니 다른 소가 들으면 어찌 불평 않겠는가?’라고 속삭였다. ‘귀에 대고 속삭이다’라는 뜻인 ‘부이세어(附耳細語)’의 유래인데, 이때 크게 깨달은 황희는 이후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홍만선(洪萬選·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양우(養牛)’조에는 외양간을 만드는 길년·길월·길일은 물론 외양간을 고쳐서는 안 되는 흉일(凶日)까지 나올 정도로 소를 아꼈다. 이런 소의 집단 매몰도 안타까운데 부실 매몰로 환경 재앙까지 우려된다 한다. 담당자들의 고통도 크겠지만 소를 인간처럼 여겼던 선조들이라면 저세상으로 보내는 의식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