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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만 이집트인 중 무바라크 대신할 사람 없겠나”

중앙선데이

입력

4일(현지시간)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이슬람 신도들이 거리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날(금요일)은 주례기도일이다. 불에 탄 경찰 차량이 거리에 방치돼 있다. [알렉산드리아 로이터=연합뉴스]

설 연휴였던 지난 2박3일, 기자는 이집크 카이로에서 한 편의 거대한 부조리극(不條理劇)을 관람했다. 수많은 사람이 무대에 올라가 연기를 하고 있지만 조리에 닿지 않는 동작과 대사가 혼란스럽게 오갈 뿐이었다. 정확한 결말을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누구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유일한 결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누구는 더 큰 혼란을 막으려면 그가 임기까지는 버텨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카프카의 성채(城砦)’로 변한 인구 1800만 명의 대도시 카이로를 짓누르는 것은 극도의 불안감이다.

반정부 시위대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는 전망이 일단은 우세해 보인다. 무바라크의 사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4일 이집트의 권력 이양 작업이 당장 시작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결말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사면초가의 처지에서도 무바라크는 끝까지 버틸 태세다. 자신의 하야(下野)가 몰고올 국가적 혼란 때문에 물러나고 싶어도 당장은 못 물러난다는 것이다. 위기를 수습하고, 9월 임기에 맞춰 퇴진한다는 것이다. 관영매체에 따르면 그는 5일 카이로 시내 대통령 궁에서 경제장관 회의를 주재했다.

시위 12일째인 4일(현지시간) 시위의 메카로 변한 시내 타흐리르 광장으로 통하는 나일강 서편의 갈리 다리. 전차를 앞세운 군인들이 다리를 건너려는 사람들을 막고 일일이 몸수색을 하고 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젊은이뿐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도 많았다. 히잡을 두른 여성도 종종 눈에 띄었다. 각계각층이 망라된 느낌이었다. 표정에서는 결연함이 묻어났다.

이날로 시위 참가가 세 번째라는 무스타파 압델라흐만(63)은 “무바라크의 차기 대선 불출마 선언은 속임수”라고 단언했다. 무바라크 체제를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인 계엄령 종식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업원 500명 규모의 제약회사 임원이라는 그는 “진정으로 나라를 생각한다면 무바라크는 즉각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무바라크의 퇴장으로 인한 권력 공백 가능성에 대해서는 “8000만 이집트인 중 리더가 될 만한 사람 한 명이 없겠느냐”는 말로 일축했다. 호텔 종업원 무함마드 할리트(28)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6개월을 더 못 기다려 나라를 망치게 할 순 없는 것 아니냐”며 “무바라크가 현 체제를 바꿔놓고 물러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2일과 3일 벌어진 친(親)무바라크 시위대와 반(反)무바라크 시위대의 느닷없는 유혈충돌은 무정부 상태에 대한 우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2일 오후 말과 낙타에 올라 탄 일군의 시위대가 갑자기 들이닥치면서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흉기를 들고 나타난 친무바라크 시위대는 광장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고 있던 반정부 시위대에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경고하기 위해 정부와 집권당이 매수한 불량배들과 사복경찰을 동원해 꾸민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집트 정부는 외부 세력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면서 최대 반정부 세력인 무슬림 형제단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카이로=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bmbm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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