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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한겨울 한강에서 얼음 뜨던 사람들, 일시에 일자리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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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20년대 한강의 채빙(採氷) 모습을 담은 엽서. “추운 나라에서는 그리 진기한 장면이 아니지만 긴 톱과 갈고리로 얼음을 뜨는 저 백의(白衣)의 무리는 이채롭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한강에서 채빙하려면 얼음 두께가 20cm 이상은 될 만큼 날이 추워야 했으니 동상(凍傷)은 빙부의 직업병이었다.

조선시대에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良人) 남자에게는 군졸이 되거나 군졸이 된 이웃의 농사를 대신 지어주는 군역(軍役)과 성을 쌓거나 도로를 닦는 토목사업장에 나가 일하는 요역(?役)의 의무가 있었다. 다만 왕경(王京)인 서울 주민들은 이들 역(役)을 면제받는 대신 방역(坊役)이라는 특별한 역을 졌다.

 서울은 대도시면서 왕경답게 유지돼야 하는 공간이었으니 사람 손을 빌릴 일이 많았다. 대궐 안에 쌓인 낙엽을 치우는 일, 대궐의 각 방을 도배하는 일, 국상 때 상여 메는 일, 서울 주변 산에서 송충이 잡는 일 등이 동네별로 할당됐다. 그런데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의 방역은 편한 축이었다. 한강변 사람들은 배에서 곡식을 내려 성 안으로 옮기는 일과 겨울철 얼음을 떠서 빙고(氷庫)에 쟁이는 일을 맡았다. 특히 한강물이 꽁꽁 얼 만큼 추운 날씨에 변변한 방한 장구도 없이 차디찬 얼음을 만져야 했던 장빙역(藏氷役)은 방역 중에서 가장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방역 제도가 무너진 조선 후기에는 관청이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일을 시켰는데, 이때의 관청도 곧 ‘용역업체’에 맡기는 편이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강변 동네의 가난한 사람이나 뜨내기 인부를 모아 채빙(採氷)을 전담하는 민간 업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사설 빙고를 만들어 얼음 생산·저장·판매의 전 분야로 영업 범위를 확장했다. 의무로 하던 ‘역’이 시장 원리에 따른 ‘업(業)’으로 바뀐 것이다.

 1921년 겨울, 경기도청은 ‘하천사용허가’를 받은 업자에 한해 사용료를 받고 지정된 구역에서만 채빙을 허가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또 위생상태가 불량한 빙고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 이면에는 이 해에 설립된 두 개의 일본인 회사에 특혜를 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후 조선천연빙주식회사와 경성천연빙주식회사는 매년 한강 채빙량의 80% 이상을 독점했다. 서빙고·동빙고·동작동에 사는 가난한 한국인들 500~600명이 겨울이면 이들 회사의 ‘임시직 고용자’가 됐다. 1927년부터 공장에서 생산하는 인조빙(人造氷)이 출현했지만 천연빙은 상대적으로 싼 가격과 ‘우수한 빙질’을 무기로 매년 2~3만t의 시장 규모를 유지했다.

 1937년 겨울, 경기도청은 위생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돌연 한강 얼음 채취를 금지했다. 고작 20원 안팎의 수입을 위해 한겨울 고역을 마다않던 빙부(氷夫)들의 하소연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만으로도 이미 서럽다. 그런 사람들 가슴에 또 다른 대못을 박는 일은 적을수록 좋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