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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봉 기자의 도심 트레킹 ⑲서울 강서구 양천향교~구암근린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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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이 서울의 산세를 그리다

얼어붙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궁산 정상을 걷는다. 겸재가 명승첩을 그리며 풍류를 즐겼을 소악루가 지척이다. [김성룡 기자]

양천향교가 있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를 걸었다. 양천향교는 서울에 하나 남은 향교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현감을 지냈던 곳이고, 구암 허준의 출생지가 가까이 있다. 겸재가 한강과 서울의 산세를 화폭에 옮겼던 궁산 소악루(사진)를 지난다. 이번 코스는 옛 사람의 자취를 더듬는 길이다. 설을 앞둔 ‘도심 트레킹’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2번 출구로 나온다. 표지판이 ‘겸재정선기념관’을 가리키는 왼쪽 골목으로 접어든다. 30m쯤 걷다 오른쪽으로 틀어 동네 길을 따라 걷는다. 200m쯤 걷다 길이 갈라지지만 개의치 말고 직진한다. 황금색 외장의 사찰인 ‘흥원사’가 보이는 쪽이다. 샛길을 죽 따라 들어오다 보면 길 끝에 홍살문이 보인다.

 여기가 1411년(태종 11년) 창건한 양천향교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대성전·명륜당 등 6개의 건물이 전부다. 단아하지만 정제된 구조에 절도가 있어 사찰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평소엔 출입을 통제하지만 단체로 예약을 하면 개방한다(02-2658-9988).

양천향교를 나와 오른쪽으로 30m쯤 간 뒤 작은 사거리가 나오면 오른쪽 오르막을 오른다. 오르막 위쪽으로 궁상근린공원 입구가 나온다. 앞으로 보이는 유리 건물이 겸재정선기념관이다. 입장료 1000원.

 기념관에 겸재의 산수화 원본은 많지 않다. 청풍계도·조어도 등 서너 작품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겸재가 진경산수화의 대가이자 화성(畵聖)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관념에 그쳤던 산수화를 진경의 경지로 끌어올린 건 그의 성실함이었다. 젊었을 적 금강산을 찾았고, 일흔이 넘어서도 팔도를 누비며 ‘진짜 눈에 보이는(眞景)’ 산수(山水)를 그려냈다. 겸재의 작품은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1000원짜리 지폐 뒷면에 있는 그림이 겸재의 ‘계상정거(溪上靜居)’다.

광주에서 떠내려왔다는 큰바위 2개

기념관을 나와 궁산기념공원 입구로 접어든다. 궁산은 강을 뒤로하고 평지를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어 이 땅에 전쟁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언제나 요충지였다. 백제가 성을 쌓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이 모였고, 한국전쟁 때는 군부대가 주둔했다. 그만큼 일대 산천을 바라보는 경관이 빼어나다.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왼쪽에 있는 나무 계단을 오른다. 조금만 오르면 정상이다. 정상의 북동쪽은 한강과 마주한다. 나무 울타리를 따라 걸으니 한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려가는 길에 복원된 소악루가 있다. 겸재가 산수화를 그린 곳이다. 소악루 왼편 흙길을 따라 내려온다. 버스 차고지 뒤편까지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아파트 단지 옆길로 이어진다. 올림픽대로가 바로 옆을 지나는데도 소음은 크지 않다.

 길을 따라 걷다 구암근린공원으로 들어선다. 허준의 호를 따서 지었는데, 집채만 한 바위 2개가 볼 만하다.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 왔다고 하여 광주암이라 불린다. 옛날엔 광주군에서 이 바위에 대한 대여료 명목으로 매년 싸리빗자루를 몇 개씩 받아갔다고 한다. 그러다 양천현감이 “빗자루는 줄 수 없으니 바위를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는 빗자루를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주택단지가 개발되면서 매몰하려고 했으나, 지키자는 목소리가 높아 호수공원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과거엔 이 일대까지 강물이 흘렀고 거대한 바위가 기이한 형상을 빚어내 풍광이 좋았다고 한다.

 구암근린공원 뒷문으로 나오면 허준박물관이 나온다. 약재·약기·한의학에 관한 유물이 대부분이지만, 한평생 의학에 매진한 허준의 고집스러운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입장료 800원.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 주유소 옆길을 따라 300m쯤 가다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400m를 더 가면 지하철 9호선 가양역이 나온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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