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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기심과 대비되는 〈송어〉의 삶

중앙일보

입력

〈송어〉를 만든 박종원 감독(41)은 올해가 데뷔 10년째이다. 89년 〈구로아리랑〉으로 데뷔한 그는 10년 동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영원한 제국〉(1995) 등 단 세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이제 4년만에 새로운 작품 〈송어〉를 내놓았다. 사회와 권력의 문제를 '서늘한' 시선으로 꼬집는 그의 작품들은 국내 및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작품성과 진지함을 인정받아왔는데 〈송어〉 역시 지난 7일 도쿄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현재 하와이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있다.

94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얼음물고기〉를 영화화한 〈송어〉는 원래 제작하기로 했던 영화사가 어려움에 봉착하고, 그 바람에 이혜영, 심혜진, 조재현, 황인성, 김세동으로 라이업되었던 출연진도 완전히 바뀌는 등 우여곡절 끝에 감독의 말을 빌자면 "동인형식"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영화진흥공사 판권융자 지원작에 선정돼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래서 제작사가 '송어프로덕션'으로 명시되어 있다. 박 감독이 제작과 각본, 연출의 1인3역을 해낸 셈이다.

강원도 산골의 송어양식장에서 100% 로케촬영된 〈송어〉는 문학작품을 각색했던 박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창작시나리오를 썼고, 또 복잡한 사회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니라 산속의 2박3일이라는 폐쇄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예기치않은 상황들을 그리고 있지만 사회와 인간에 대한 박 감독의 '서늘한' 관찰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 오랜만에 작품을 내놓은 중견감독이 일관된 문제의식을 실망스럽지 않은 작품 속에 담아냈다는 점은 우리 제작풍토를 생각할 때 매우 반가운 일이다.

영화의 모티브를 이루는 것은 송어가 "아주 작은 스트레스에도 자살을 선택하는 얼음 물고기"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런 송어의 특징과 의외의 살인사건 앞에서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사랑도, 우정도 보란 듯이 팽개치는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대비시킨다. 〈송어〉의 보도자료는 송어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생존의 의지가 환경에 의해 스스로 자멸해버리고 마는 지금의 현실은 우리에게 송어와 같은 삶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차라리 송어와 같은 삶이 양심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최소한 남한테 피해는 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영화 내내 요즘 세태를 떠올리면서 '인간성'의 문제에 또다시 서늘한 시선을 들이댄 감독의 시도에 충분히 공감했다.

영화는 서울을 빠져나가는 차량으로 가득찬 고속도로 톨게이트장면으로 시작해 서울로 다시 들어오는 방향의 톨게이트 장면으로 끝난다. 이 순환의 중간을 메우는 것은 2박3일간의 산골체류. 민수부부와 병관부부, 그리고 민수의 처제 등 5명의 도시인은 세속의 야망을 모두 버리고 산속에서 송어양식장을 하며 칩거해사는 동창 창현(황인성)을 찾아간다. 창현은 세속적인 안락함을 위해 사랑을 버린 민수(설경구)의 아내 정화(강수연)의 옛애인으로 지금도 그 감정이 서로 남아있는 사이다.

복잡한 도시생활을 떠나 자연 속에 놀러간 5사람은 처음엔 모든 것이 신선놀음같아 즐거워하지만 이내 갑갑증을 느낀다.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사냥꾼 일행은 이들의 안정을 위협하고, 이들의 폭력 앞에 무기력함을 느꼈던 민수와 병관(김세동)은 그 분함을 삭이지 못하다가, 민수의 처제에게 마음을 둔 동네청년 태주(김인권)에게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한다. 만만하니까. 이같은 역학관계는 결국 예기치 않은 살인사건을 부르고, 5명만이 목격한 이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친구도, 사랑도, 체면도 버린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비굴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소란 속에서 송어들은 말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남을 못살게 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인간들보다 차라리 자기가 죽어버리는 송어의 생태가 오히려 존경스럽다.

〈송어〉는 〈구로아리랑〉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처럼 직접적으로 권력의 문제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일상 속에 내재해 있는 폭력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인간관계, 현실과 권력의 문제를 돌아보게 만든다.

추신:요즘 뉴스를 보면 양심과 신의와 도덕을 저버린 범죄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출두하는 모습들이 줄을 잇는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어제의 동지도 없고, 일관된 논리도 없으며 그래서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다. 남에게 씻지못할 피해를 주고도 멀쩡한 사람들, 〈송어〉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겨냥해 만든 영화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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