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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때도 조세피난처 있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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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지난 17일 영국 런던 서부 노포크팰리스가(街)에 자리 잡은 수수한 황토색 3층 벽돌 건물. 이곳에 자리 잡은 ‘프런트라인 클럽’에서 굳은 표정의 중년 남자가 2장의 CD를 호리호리한 사내에게 건넸다.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졌다. 수백 년간 철통처럼 지켜졌던 스위스은행의 비밀주의가 허물어지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CD를 건넨 인물은 전직 스위스은행원 루돌프 엘머. 받은 사람은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 CD에는 탈세를 일삼은 스위스은행의 전 세계 고객 200여 명의 명단이 수록돼 있다.

엘머는 스위스 바이에르 은행에서 8년간 근무했었다. 그는 이 기간 중 알게 된 탈세 고객 명단을 챙겨뒀다 이날 어산지에게 넘겨줬다. 엘머가 탈세 고객들의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던 건 특별했던 그의 근무지 때문이었다. ‘조세피난처’로 꼽히는 케이맨 제도 지점에서 일했던 덕이다. 이 때문에 탈세자들의 명단 공개가 임박한 가운데 전 세계 조세피난처로 향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모나코·버뮤다 등 전 세계에 20여 곳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명 조세피난처는 20여 개 정도다. 리히텐슈타인·모나코 등 유럽의 소국과 케이맨 제도·버뮤다 등 중미 캐리비언해 일대의 도서국, 그리고 바레인 등 중동 국가들이 꼽힌다. 조세피난처는 말 그대로 세금을 줄이거나 아예 내지 않을 수 있는 나라들을 의미한다. 사회보장제도가 완비된 서구 선진국에서는 부자와 이익을 많이 내는 기업들이 막대한 세금을 피하긴 불가능하다. 이런 터라 이들에게 소득세와 법인세를 아예 면제해 주거나 훨씬 적게 매기는 조세피난처는 세금 천국일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조세피난처의 역사는 유구하다. 고대 그리스 시대 때 무역상들은 도시국가 대신 주변 섬들을 물품 창고로 이용했는데 이는 아테네 등 도시 국가들이 외국산 물품에 부과하는 2%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사상 최초의 조세피난처인 셈이다.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이 이뤄지던 11세기에는 영국 본토와 아일랜드 중간에 위치한 ‘맨섬’이 피난처로 이용됐다. 어쨌거나 각종 설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의미의 진정한 첫 조세피난처는 1차 세계대전 후의 스위스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평화로운 이미지의 스위스가 음험한 느낌을 주는 조세피난처로 변신하게 된 데는 영세중립국이라는 독특한 위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8년 세계 1차대전이 끝나자 전쟁을 치른 대부분의 유럽 각국은 엄청난 전비에다 복구 비용으로 재정난에 시달린다. 이들 나라에 현실적 돌파구란 세금 인상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유럽 나라들이 세율을 급격히 올린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낮은 세율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났던 스위스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스위스는 국민들에 대한 중과세를 피할 수 있었다. 자연히 외국의 부자들은 자국의 세금 폭탄을 피해 너도나도 스위스로 몰렸고, 이들의 돈을 맡게 된 스위스은행들은 생명처럼 고객의 인적 사항 등을 비밀에 붙여주었다. 그래서 스위스은행이 검은 돈의 도피처가 된 건 전쟁 때문이라는 얘기도 이 때문이다.

어쨌거나 현재 이런저런 이유로 낮은 세율을 유지하는 나라는 많다. 쏟아지는 석유로 돈을 주체 못하는 산유국들이나 외국 투자를 유치하려는 개발도상국에서도 세금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면 이들 국가 중 어떤 곳을 조세피난처로 분류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해 2008년 미국 정부는 조세피난처가 되기 위한 요건으로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세금이 아예 없거나 적을 것. 둘째, 외국 조세담당 기관과 세금 관련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것. 셋째, 세금 관련법 집행상의 투명성을 결여할 것. 넷째, 납세 관련 해당 지역 내 거주 의무가 없을 것.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역외 금융 중심지’라고 선전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충족해야 진정한 조세피난처라고 부를 수 있다는 얘기다. 벨리즈·맨섬 등 많은 조세피난처에서는 소득세, 또는 법인세 중 하나가 부과되지 않으며 바하마처럼 아예 둘 다 없는 경우도 있다. 피난처는 이런 돈으로 고용 증대 등 이익을 얻는다.

이들 조세피난처를 통해 세금을 낮추는 방법은 몇 가지로 나뉜다. 먼저 세금을 회피하려는 인사가 이주하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007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영국배우 숀 코네리가 스페인을 거쳐 99년 바하마에서 정착한 게 대표적인 예다. 조세피난처에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회사, 즉 ‘페이퍼 컴퍼니’를 차리고 실제 영업은 다른 나라에서 벌이는 것이 두 번째 수법이다. 셋째, 원활한 인력 조달 여부와 회사의 위치 등이 별 의미 없는 사업일 경우 조세피난처가 사실상의 최적 입지가 되기도 한다. 재보험업이나 뮤추얼펀드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대형 사건·사고가 터질 경우에만 일이 진행되는 재보험회사들은 평소 별다른 일상 업무가 없는 탓에 통상 조세피난처에 세워진다. 버뮤다에 로이드·에버레스트 등 세계적인 재보험사가 집중돼 있는 것도 세금 때문이다. 외환은행 문제로 낯설지 않은 론스타 역시 세금 부담이 작은 버뮤다·룩셈브루크·벨기에 등에 근거를 두고 중과세를 피해왔다. 론스타는 한국에서의 과세 시비가 발생하자 룩셈부르크에 근거가 있는 회사라는 이유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한-룩셈부르크 간 체결된 조세조약이 납세 의무를 면제해 준다는 논리였다. 그럼에도 한국 조세당국은 과세 결정을 내렸다.

숀 코네리도 세금 피해 바하마 정착
물론 조세피난처로의 도피가 방치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각국은 명목상 거주지만 세금이 없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타국에 두고 자기 나라에서 활동하는 인사를 가만두지 않는다. 중과세하거나 아예 처벌하기도 한다. 비슷한 행동을 하는 회사들도 제재를 받긴 마찬가지다. 또 선진국으로 이뤄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등 국제기구에서는 조세피난처로 지목된 국가들에 대해 과세의 투명성이나 탈세 혐의자와 관련된 정보 제공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탈세(脫稅)까지는 아니더라도 절세(節稅)하려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 조세피난처를 없애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듯하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nam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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