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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넘겨보지 말고 들춰봅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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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출판사 문학동네가 연번호를 붙인 시선집을 새로 시작했다. ‘문학동네시인선’ 1번으로 최승호(57) 시인의 『아메바』, 2번 허수경(47) 시인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3번 송재학(56) 시인의 『내간체(內簡體)를 얻다』 등 시집 세 권을 한꺼번에 냈다.

 그동안 문학동네에 시선집이 없지는 않았다. ‘문학동네시집’이라는 제목 아래 1번으로 안도현 시인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출판사가 문을 열던 해인 1994년 출간했다. 절판된 시집 중 아까운 것들을 추려 ‘포에지 시리즈’란 이름으로 복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번호를 단 시선집이 꾸준히 이어지지 못하다 보니 200권 가까이 시집을 냈어도 창비나 문학과지성사의 시선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졌다. 선뜻 시집을 내겠다는 시인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시인들은 아무래도 비중 있는 시선집에 시집이 포함되기를 바란다. 절판 없이 오래도록 자신들의 시집을 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후발주자로서 문학동네 시선집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기존 시선집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이냐. 언제까지 시선집을 끌고 갈 수 있느냐.

 시선집 존속 여부는 출판사의 의지 문제다. 시선집 기획을 맡은 시인 김민정씨와 평론가 신형철씨는 시집의 형식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보통 시집 모양의 일반판, 가로·세로를 3∼4㎝ 키우고 긴 방향으로 시행을 가로쓰기 한 특별판 두 가지 판형을 한꺼번에 냈다. 독자 입장에서는 한 시집을 두 가지 판형으로 감상할 수 있다.

19일 문학동네 시인선 출범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사진은 『아메바』작가 최승호씨(왼쪽)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작가 허수경씨. [연합뉴스]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신씨는 “문학동네시인선의 차별성을 과시하고 증명하기보다는 시인들이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판을 깔아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일단 시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최승호씨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느낌”이라고 했다. 10년 만에 한국을 찾은 독일 거주 시인 허수경씨는 “요즘 내 시가 수다스러워져 고민인데 특별판 판형이 넓다 보니 구렁에서 건져진 느낌”이라고 했다.

 허씨는 독일에서 공부해 몇 해 전 근동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전공 공부를 위해 라틴어, 수메르어, 아카드어 등을 공부해야 했다. 요즘도 유적 발굴을 위해 1년에 한 차례씩 터키를 찾는다. 모국어 아닌 언어환경 속에서 수 천 년 쌓인 시간의 퇴적층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은 시 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허씨는 “모국어는 잊혀지지 않는다. 자기운동을 한달까, 변하기는 하는 것이어서 요즘은 언어가 유기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런 안팎 환경의 변화는 그의 시집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당장 첫 번째 시 ‘나의 도시’부터가 그렇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시의 첫 두 행이다. 단순히 외국 도시를 거명해 이국적인 시가 아니고, 장구한 시간의 원근법 속에서 온갖 인간적인 노력과 정념을 무연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이채롭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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