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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기자가 만난 시장 고수] 서재형 한국창의투자자문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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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그가 깃발을 꽂자 한 달 만에 1조4000억원의 돈이 몰렸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이 “계속 같이 일하자”고 잡았지만 뿌리치고 나왔다. 지금 대부분의 증권사 영업창구 앞에는 그의 ‘자문형 랩어카운트’ 상품을 알리는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금융감독 당국은 “시장을 혼탁하게 만드는지 예의주시하겠다”고 경고장을 보냈다. 서재형(47·사진) 한국창의투자자문 대표 얘기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돈의 흐름에 밝은 깔끔하고 샤프한 펀드매니저의 이미지를 연상하며 그의 여의도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나지막하게 느릿느릿 이어가는 경상도 말투에 수더분한 표정이 영락없는 시골 농군 품새다. 그의 손에는 칼에 벤 듯한 상처가 여기저기 패어 있었다.

-꼭 농사꾼 같네요.

 “(웃으며) 제 손의 상처들이 다 낫에 벤 것들입니다. 경북 안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며 자랐어요. 중학교 때까지 농사일 돕기에 바빴죠. 대구상고를 나와 취직할 참이었는데 큰형님이 ‘한 학기 등록금은 마련해볼 테니 일단 대학에 들어가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네 달을 밤을 새우며 공부해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졸업을 했죠.”

 서 대표가 대학에 들어가 과 동기로 만난 사람이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이었다. “첫 직장은 국민은행이었습니다. 기획파트를 거쳐 주식운용팀에서 일하고 있는데 친구 구재상이 함께 일해보자고 해서 2004년 미래에셋으로 자리를 옮겼죠. 따지고 보면 제가 펀드매니저로 일한 건 10년 정도, 그리 긴 편은 아니었죠.”

 미래에셋에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그의 펀드는 속속 업계 최상위 수익률에 랭크됐고 판매가 급증했다. 전성기인 2006~2008년 그는 디스커버리펀드 시리즈 등 9조원 정도를 굴렸다. 박현주 회장은 그를 전무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서 대표는 지난해 7월 미래에셋을 나왔고 12월 투자자문사를 차렸다.

 -미래에셋과 결별한 이유가 뭡니까.

 “2년 전부터 퇴직 의사를 밝혔습니다. 후배들에게 길도 열어줘야 할 것 같고 역할의 한계 같은 것도 느꼈습니다. 나의 투자철학을 펼칠 나의 회사를 갖고 싶었습니다. 박현주 회장도 처음엔 만류했지만 ‘그렇다면 자문사를 해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요즘 우리 상품을 제일 잘 팔아주는 곳 중 하나가 미래에셋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한 달 만에 1조4000억원을 모았습니다. 시류에 편승한 거품 아닙니까.

 “분명 기대 이상입니다. 운도 따랐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량 기업에 장기 투자해 기업의 부(富)를 나의 부로 이전시키자는 우리의 투자철학에 공감하는 고객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길게 보고 시장의 평판과 고객의 신뢰로 먹고사는 금융회사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서 대표는 자문형 랩 돌풍에 대한 금융당국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듯 “새로운 투자문화로 반드시 고객과 시장에 보답하겠다”고 누차 강조했다.

 “금융업은 대중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생명입니다. 우리는 고객들이 불편해할 때 주식을 사자고 하고, 편안해할 때 리스크 관리에 들어가자고 얘기할 것입니다. 대중이 앞뒤 안 가리고 투자하겠다고 할 때 우리는 사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고 상품 판매도 멈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때입니까.

 “아직 불안해하고 불편해하는 일반 투자자가 많지 않습니까. 주식을 사야 할 때입니다. 아마 코스피지수가 2400~2500쯤 가면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에 주식을 사겠다고 몰릴 것이라고 봅니다. 그때가 주식투자를 멈춰야 할 시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금융회사는 그때 거꾸로 온갖 투자상품을 밀어낼 것입니다.”

 -장기 투자를 강조했는데 랩어카운트라는 게 원래 단기 고수익을 겨냥하는 상품 아닙니까.

 “물론 우리도 1년 이내로 굴리는 액티브형 상품도 팝니다. 하지만 주력은 어디까지나 3년 이상을 보는 장기 투자형입니다. 우리의 모토는 ‘엄마처럼 편안한 주식’을 사서 ‘시간에 기댄 투자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의 파동을 타는 투자는 이제껏 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융당국에선 소수 종목으로 불공정 매매를 하지 않을까 주시하고 있는데.

 “우리가 15~20개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삼성전자·현대중공업·KB금융 같은 초대형 종목들의 주가를 어떻게 조작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런 종목들을 장기 보유하도록 자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최근 1개월 수익률이 7%대입니다. 처음엔 오해도 있었지만 점차 풀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삼성전자처럼 뻔한 종목을 사서 장기 보유하는 것이라면 굳이 연 2%대의 수수료를 내고 랩어카운트에 가입할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저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분들은 직접 주식에 투자하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게 여간해선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조바심을 견디지 못해 컴퓨터 마우스를 놀려 사고팔기를 반복하는 것이죠. 한국 증시에서 주식매매 수수료와 거래세로 투자자들이 무는 비용이 연간 6조원이 넘습니다. 저희 같은 투자 대행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장기 투자할 좋은 기업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갑(甲)의 위치에 있는 기업, 소비자를 확실히 잡고 있는 기업입니다. 우리가 항상 브랜드를 접하는 기업 중에서 최고 위치에 있는 기업들입니다. 업종 대표 블루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다음 위치의 옐로칩에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기업이란 게 끊임없이 흥하고 망하지 않습니까. 종목 선구안은 어떻게 기르는지요.

 “맞습니다. 삼성전자도 팔아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나의 투자 안목은 인문학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역사나 철학, 문학을 읽습니다. 거기서 기업의 흥망에 대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주식투자는 기업의 미래를 사는 것입니다. 기업의 꿈과 스토리를 읽어야 그게 가능합니다. 기업은 역시 사람입니다. CEO가 교만해지고 임직원들이 상호 불신하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서 대표는 “3~5년 뒤에는 한국 주식을 다 팔아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중국이 너무 바짝 쫓아와 한순간의 오만과 판단 착오로도 따라잡힐 처지에 놓였다는 설명이었다. “중국 등 다른 나라 자산에 우리의 노후자금을 몽땅 옮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글=김광기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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