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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희생이 인간을 살리니 … 토끼야, 고맙고 미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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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울아산병원 실험동물실의 이병한 박사가 실험용 토끼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토끼해에 태어난 이 박사는 국내에서 토끼를 이용해 가장 많은 실험을 했다. [김경빈 기자]

서울아산병원 실험동물연구실의 이병한(48) 박사에겐 2011년 신묘(辛卯)년의 의미가 남다르다. 1963년생. 토끼해에 태어난 그는 토끼를 실험동물로 삼는 일을 하게 됐다.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풍납동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인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는 토끼에게 미안하고, 또 고맙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국내에서 토끼로 가장 많은 실험을 한 수의사 중 한 명이다. 그는 건국대 수의학 박사 과정에 있던 96년 처음으로 토끼로 실험을 하게 됐다. 개는 비용 부담이 컸고, 쥐는 당시 실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한 번 실험을 해보니 토끼는 실험동물로서 장점이 많았어요. 체구가 크고, 한 번에 많은 혈액을 얻을 수 있죠. 또 혈관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그때 이후 토끼는 그의 실험 파트너가 됐다. “지금까지 실험한 토끼의 총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기 힘들다”고 했다. 98년 발표한 박사 논문 ‘토끼에서 저체온증의 유발에 의한 생리학적 및 임상병리학적 변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선 총 150마리의 토끼가 희생되기도 했다.

 “내가 토끼와 무슨 악연이 있기에 이렇게 토끼를 많이 죽이게 되나 … 회의감이 들 때도 많았어요.”

 대부분의 실험동물은 실험을 마친 뒤 안락사된다. 토끼는 안락사를 위해 투약하는 마취약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고통스러워하며 발버둥치는 토끼를 볼 때 토끼띠 연구자의 마음고생은 극에 달했다. 특히 결혼을 하고 아기가 태어난 뒤엔 한동안 직접 안락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아 다른 연구원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험동물의 고귀한 희생이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큰 역할을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30일 아산병원에서 열린 실험동물의 혼을 위로하는 위혼제. [김경빈 기자]

 토끼는 당뇨병, 메틸 수은중독증과 심혈관계 관련 질병 연구 등에 널리 이용된다. 토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혹은 실험적으로 유발되는 다양한 질병이 인체질환의 모델로 사용될 수 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난해 토끼가 전체 실험동물 중 쥐(약 100만 수), 조류(약 3만2000수)에 이어 셋째(약 3만 수)로 실험에 많이 사용됐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실험동물의 고통 경감과 처우 개선에 힘쓰는 것으로 토끼에 대한 죄책감을 물리친다. 한 해 몇 차례씩 열리는 토끼워크숍에 참석해 초보 연구자를 대상으로 토끼의 해부생리학, 마취·채혈 방법을 설명한다. 실험동물의 고통 경감을 위한 세미나, 병원에 새로 오는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윤리 교육에도 강사로 나선다. 이 박사는 “신묘년엔 연구자들이 조금 더 실험동물을 생각하고, 그들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희생 실험동물 위한 위혼제=지난해 12월 30일 오후 4시30분 아산병원 실험동물실 지하 1층 로비에선 희생당한 실험동물의 혼을 위로하는 위혼제가 열렸다. 아산병원은 12년째 연말마다 위혼제를 열고 있다. 125명의 연구자 앞에 선 이 박사는 “올 한 해 우리 연구실에선 쥐 1만8257수, 토끼 464수 등 총 1만8908수가 고귀하게 희생됐다”고 경과를 보고했다. 이어 서동완 교수가 위혼문을 낭독하자 연구자 일동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묵념에 들어갔다.

 “당신들의 희생은 인류의 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현대 의학 발전에 값진 밑거름이 됩니다···부디 우리 인간을 용서하시고 다음에는 더 나은 세상에 태어나 하늘이 주신 귀한 생명으로서의 자유로움과 행복을 누리시길.”

글=송지혜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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