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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기운 ‘터키 원전’ … 결국 돈의 힘에 밀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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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결국 돈의 힘이다. 터키의 원전 수주전에서 일본에 밀리고 있는 것 말이다. 아직 완전히 결판난 것은 아니지만 형세는 기울고 있다.

 꼭 1년 전인 2009년 12월 27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공사비 400억 달러(당시 환율로 약 47조원), 리비아 대수로 공사의 6배가 넘는 공사 수주에 국민 모두가 환호했다. 이를 기념해 정부는 12월 27일을 ‘원자력의 날’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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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초에는 원전을 해마다 2기씩 수출해 새로운 수출주력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놨다. 필리핀·아르헨티나 등이 원전 협의를 위해 한국을 찾았고, 터키와 원전 수주 협상도 밀도 있게 진행됐다. 곧 계약서에 사인하고 사람과 자재만 내보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제1회 ‘원자력의 날’이 됐는데도 분위기는 썰렁하다.

 한국과 터키는 흑해 연안 시놉 지역에 4기의 원전을 짓기 위해 전문가 공동연구(3~8월)를 마치고 정부 간 양해각서(MOU, 6월)까지 체결했다. 정부는 사실상 수주한 것으로 여겼다. 한때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계약 서명이 이뤄진다는 예상도 나돌았다.

 그러다 10월이 되자 기류가 변했다.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의 예고 없는 터키행이 잦아지더니 지경부 실무팀이 아예 터키에 한 달간 체류하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걸림돌이 나타난 것이다.

 그 무렵 일본 대표단이 터키를 방문했다. 결국 11월 한·터키 정상회담의 의제에서 원전 문제가 빠졌고, 일본 정부는 지난 24일 터키와 원전협력 MOU를 맺었다.

 터키에 앞서 빨간불이 처음 켜진 곳은 요르단이었다. 같은 중동 국가인 UAE에서 공사를 따낸 데다, 올 3월에는 연구용 원자로 수출계약까지 맺었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 상용원전 수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5월 요르단 정부는 일본과 프랑스 연합군을 우선협상대상자로 택했다. 이어 9월에는 베트남에서 일본이 공사를 따냈다. 한국에 뒤질 수 없다며 민·관 합동 지원단체까지 만든 일본의 첫 결실이었다.

 공들여 지은 밥이 다른 입에 들어간 데 대해 정부는 “UAE와는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해외 플랜트 공사에는 경력이 필수다. 국내에서 몇 기 지어 봤다는 경험은 소용이 없다. 원전 수주 경험이 전무했던 한국으로선 UAE 입찰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UAE 고위층과 협상을 벌일 정도로 총력전을 펼쳤다. 가격 조건이 약간 불리해도 감수했고, 병력 파견 요청도 수용했다.

 일단 수주 경력이 생긴 이상 입장이 달라졌다. 설익은 밥이나 탄 밥까지 먹을 필요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요르단 원전이 프랑스에 넘어간 것에 대해 한전 해외사업팀 관계자는 “부지가 해안에서 떨어져 있어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데다, 요르단 측이 수의계약을 하겠다는 당초 약속과 달리 경쟁입찰로 바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베트남 원전에 대해서도 지경부 관계자는 “현재 인력과 자금 사정을 고려할 때 발주가 나오는 대로 수주경쟁에 뛰어들 처지가 아니다”며 “베트남처럼 조건이 맞지 않는 곳은 원천적으로 입찰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장벽이 있다. 바로 돈의 힘, 즉 금융 경쟁력이다.

 터키와의 협상에서 정부와 한전은 막판에 터키 정부가 전기요금을 보장하는 문제에 매달렸다. 원전 건설의 구조 때문이다. 터키의 경우 사상 최초로 원전 건설에 프로젝트파이낸싱(PF) 기법이 도입된다. 짓는 쪽에서 소요자금을 대고, 원전에서 나오는 전기요금을 받아 투자비를 회수한다. 전기요금이 결국 원전 건설비인 셈이다. UAE와는 달리 한번에 공사비를 주기 어려운 나라에선 앞으로도 이런 방식이 일반화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여기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약 14조원(건설비의 70%)에 이르는 돈이 국내에는 없다. 국제금융시장에서 빌려와야 하는데, 터키 정부가 원전에서 나오는 전기 구매를 얼마나 보장하느냐에 따라 금리가 달라진다.

 또 국내 은행들은 이처럼 큰 자금을 취급해본 경험이 없다. 결국 외국 은행에 주선을 맡겨야 하는데 금리가 높고 수수료까지 줘야 한다. 이 때문에 남의 나라 전기료를 올리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최경환 장관은 “전력 단가를 ㎾당 1센트 깎으면 연간 4000억원이 줄고 회수기간 20년을 고려하면 8조원이 삭감된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은 풍부한 국내 자금을 이용할 수 있다. 또 국제 자금을 운전해본 경험이 있는 대형 은행도 많다. 돈을 매개로 하는 협상에선 단연 유리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앞으로다. 물꼬가 트인 이상, 앞으로 발주되는 원전공사는 대부분 PF 방식일 공산이 크다. 정부도 이런 점을 고려해 TF 팀까지 만들어 금융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지경부 고위 관계자는 “내년 상반기 중으로 종합적인 금융 지원책이 나올 것”이라며 “하지만 금융위원회와 조율이 잘 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국이 원전 수출국 반열에 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입지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지경부와 한전의 원전 관계자들은 “두 번째 수주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쟁국 입장에서도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다. 한국이 두 번째 수주에 성공하면 확실한 라이벌로 자리 잡고, 자기에게 돌아올 몫이 그만큼 줄기 때문이다. 한국이 터키와 협상을 진행 중인 것을 뻔히 아는 일본이 지난 10월 협상단을 터키에 파견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분간 이런 외교적 무례는 물론이고, 저가 공세도 거세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예상이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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