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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만 한우의 아빠 씨수소 50마리 지켜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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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호 04면

구제역 백신 접종을 시작한 25일 수의과학검역원 수의사들이 경기도 고양시 성사동의 한 젖소 농가에서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눈발이 흩날리는 25일 오후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를 빠져나와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도로 양 옆 야트막한 초지 언덕과 주변이 이미 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다. 330만 평에 이르는 농협중앙회 산하 한우개량사업소의 목장이다. 국내 유일의 한우 씨수소 개량과 정액 생산 시설이다. 이곳은 전국 300만 마리 한우의 ‘아빠’ 소들이 사는 곳이다. 우리나라 한우의 95%는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다. 인공수정에 쓰이는 정액을 생산하는 전국 유일의 시설이 바로 이곳이다. 정액 생산의 임무를 띤 ‘현역’ 보증 씨수소 50마리와 후보 씨수소 74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만약 이곳의 한우가 구제역에 걸려 살처분되면 당장 한우 축산업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에다 눈까지 내린 탓도 있겠지만 구제역 위험 탓인지 목장 어디에도 눈에 띄는 소가 없었다. 편도 1차로 지방도에는 소독액을 분무하는 ‘광역 소독 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충청 지역은 아직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곳이지만, 한우개량사업소는 지난 9일 본격적인 방역작업에 들어갔다. 사업소가 지방도 바로 옆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사업소 방역담당인 임연수 가축병원장은 “9일부터 매일 5시간 동안 해미~운산 간 도로 7.5㎞에 소독액을 뿌리고 있다”고 말했다.
운산면 소재지를 지나니 도로를 가로질러 설치된 차량 소독시설이 나타났다. 영하의 날씨에 눈까지 내리고 있었지만 차가 지날 때마다 소독액이 뿌려졌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니 측백나무가 담처럼 둘러싼 곳이 나왔다. 도로 왼쪽에 ‘씨수소 사육장(Bull Barn)’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한우개량사업소 직원들은 일절 만날 수 없었다. 서산에서 멀지 않은 천안의 한 사슴농장에서 21일 구제역 의심신고가 들어온 이후로 43명 전 직원에게 퇴근금지와 외부인 접촉금지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천안의 사슴농장은 구제역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관계자 차량이 희뿌연 소독 분무액을 덮어쓴 뒤에야 사업소 안으로 들어갔다.
기자는 사업소 앞 도로에서 휴대전화로만 취재할 수 있었다. 원유석 소장은 “혹시라도 모를 바이러스 전염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사업소 측은 혹시나 모를 구제역 감염 가능성을 막기 위해 지난 16일부터 씨수소 긴급 피난작전에 들어갔다. 사육장과 지방도가 불과 수십m밖에 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후보 씨수소 53마리를 16, 17, 22, 23일 네 차례로 나눠서 도로에서 2.5㎞ 떨어진 농장 안 해발 140m 산 위 제3 방사장으로 대피시켰다. 하지만 비상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액을 계속 공급해야 하는 현역 씨수소 50마리는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도로 옆 방사장 축사는 그래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실내지만, 산 위 방사장은 환경이 더 열악하다. 축사 남쪽으로는 벽이 없이 트여 있어 영하 10도의 추위에 들이치는 눈보라까지 견뎌야 한다.
원 소장은 “산 위 축사는 좁은 데다 말 그대로 축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작업 중인 씨수소는 옮길 수가 없다”며 “그렇지 않아도 내년 상반기 중 산 위 제3 방사장에 정액 채취 시설 등을 갖춘 건물을 신축해 도로 옆 씨수소 방사장을 완전히 옮길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업소는 그동안 일부 씨수소를 다른 지방으로 분산 배치하는 작업도 해왔다. 2002년 구제역 발생 이후 전북 무주군 장안리에 49마리를 먼저 보냈고, 올 5월에도 경북 영양군 용화리로 27마리를 보냈다. 서산의 씨수소들이 구제역에 걸리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씨수소의 명맥을 잇기 위한 조치다. 올 2월 초에는 파주에 있던 정액 전국 보급소도 대전으로 옮겼다.
원 소장은 “씨수소가 구제역으로 몰살된다면 1983년부터 육성해온 한우개량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심각한 상황”이라며 “다시 원상복구한다 해도 최소 1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부실 통제에 무너진 명품 횡성 한우
23일 오전 중앙고속도로 홍천 IC를 빠져 나와 강원도 횡성에 들어섰다. 횡성은 국내 최고의 명품 한우 산지다.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구제역 바이러스 차단을 위한 차량 소독시설이 나타났다. 차량 양 옆으로 쏟아지는 희뿌연 소독액을 흠뻑 덮어썼다. 창문을 올렸는데도 역한 소독액 냄새가 실내로 스며들었다. 스마트폰에 속보가 떴다. 구제역으로 의심신고된 원주의 한우농가가 정밀검사 결과 구제역으로 양성 확인됐다는 뉴스다. 원주시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위쪽이 바로 횡성군이다.
그때까지 이 지역 소들은 구제역 의심신고는 있었지만 감염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전날 구제역 의심신고가 들어왔다는 횡성 학곡2리를 찾았다. 이모씨 농가의 소 27마리 중 한 마리가 거품침을 흘리고, 혀 안쪽에 수포가 생겼다는 신고다. 군청 관계자는 “이씨가 원주에 집이 있어 횡성농가를 왔다갔다 하는데, 그때 구제역 바이러스를 묻혀온 게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하얀 방역복을 머리까지 덮어쓴 군청 직원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왕복 2차로 도로를 가로질러 차량 방역 분무기를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도로 양 옆으로 ‘출입금지, 구제역 방역’이라는 입간판 3개가 세워져 있다. 소독 작업을 도울 119 소방차들이 막 도착했다. 군청 직원이라는 남자가 차를 세웠다. “마을 위쪽 농가에 구제역 의심신고가 들어왔어요. 주민은 마을을 나갈 수 없고, 외부인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30여 분간 머물렀다. 20t이 넘는 초대형 볼보 덤프 트럭들이 통제선을 넘어 끊임없이 들락날락했다. 군청직원들이 휴대용 분무기로 차량에 소독액을 뿌렸다. 차량을 막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마을 안쪽에 채석장이 있어 트럭들이 오간다. 채석장과 신고 농가는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뒤 승용차 한 대가 마을입구로 들어왔다. 군청직원이 차를 막았다. 중년의 남자가 창문을 내리고 “주민이에요. 밖에 약 사러 갔다 오는 길이에요”라고 답했다. 군청직원이 아무 말 없이 승용차를 들여보내 줬다. “마을 주민이라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아직 확진 판정 난 것도 아니고, 앞에서 소독을 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앞뒤가 안 맞는 설명이다. 조금 전 “마을을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이 무색해졌다.
차를 돌려 구제역 방역 상황실이 마련된 읍내 횡성군청으로 향했다. 3층 축산과에 마련된 상황실에는 다른 과에서 파견된 직원들과 취재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축산과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전화를 받느라 기자가 질문할 틈새가 없었다. 사무실 한쪽에 학곡리 구제역 의심농가를 가운데 두고 동심원들을 그려놓은 지도가 세워져 있었다. 반경 500m 선은 발생지역, 3㎞ 선은 위험지역, 10㎞ 선은 경계지역이란 표시다. 500m 안에는 의심신고 농가를 비롯한 세 농가에 44마리의 한우가 있다. 3㎞ 안에는 1700마리, 10㎞ 안에는 2만3000마리의 한우가 있다. 횡성군 전체에 2100가구 4만8000마리의 한우가 있다고 하니, 구제역 의심신고 농가에서 반경 10㎞ 안에 횡성군 전체 한우의 절반이 있는 셈이다.
조우형 축산과장은 “그럴 일이 없어야지만 만약 10㎞ 이내 한우를 모두 살처분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안동은 지금 유령의 도시가 됐다고 그러는데 남의 일이 아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난 월요일 바로 위쪽 평창에서 구제역 의심신고가 들어오면서부터 횡성군에 비상이 걸렸다. 그때부터 평창으로 들어오는 국도는 모두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군청을 나와 인근 마산리 마을로 들어섰다. 19번 지방도로 왼쪽 저수지 너머로 ‘횡성축협한우’라고 쓴 붉은 색 대형 간판을 단 축사가 보였다. 축사에는 누런 색 한우 30여 마리만 보일 뿐 인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진입로 앞쪽에는 생석회가 넓게 뿌려져 있었다. 군청에서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농장주 김동원(63)씨는 “축사 바로 앞에 지방도가 지나가고 있어 불안하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루 두 번 축사를 소독하고 입구에 생석회를 뿌리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도 소를 죽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법에 따라야 하겠지만 제발 구제역이 이쪽까지 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도로 건너편 마을에도 한우 축사 3곳이 있었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주민들은 찾아 볼 수 없고 개들만 짖어대고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밝은 회색빛 생석회가 뿌려져 있었다.
횡성군을 떠나 서울~춘천 간 고속도로에 몸을 얹었다.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횡성 학곡2리 구제역 의심신고가 확정으로 판결 났어.” 이날 하루 횡성군 학곡1리의 또 다른 한우농가와 유현리의 젖소농가 등 횡성군에서만 5곳에서 구제역 의심 신고가 들어왔다. 이 중 학곡1리와 유현리가 다음 날 구제역 감염 확정판결을 받았다. 22일부터 크리스마스날까지 횡성에서만 237마리의 한우와 젖소 96마리, 염소 6마리를 살처분했다.
횡성한우는 전국 ‘브랜드 파워’ 대회에서 4년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1등급 출현율 87%로 전국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횡성 한우만 연간 매출이 800억원에 이르며 연관사업까지 합치면 최대 3000억원에 이를 정도로 횡성군의 대표적 산업이다. 횡성군은 매년 10월이면 ‘횡성한우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 5일 동안 전국에서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횡성군 인구(4만5000명)의 11배에 달하는 규모다. 축제를 통해 얻어지는 경제적 수익만도 300억원이 넘는다.

23일 구제역이 발생한 횡성 학곡리 마을 앞에서 군청 직원이 차량 통제를 하고 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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