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성장하는 미래, 맹목적으로 믿다간 큰 코 다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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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28면

③네 가지 미래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지난번 글에서 나는 미래학이 ‘미래’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미래는 실증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학이 수행하는 과제 중 하나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의 이미지를 확인하고 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현 사회의 문제를 풀어낼 대안이 될 수 있고, 토론 대상으로 열려 있으며, 삶의 투쟁과 희망을 반영한다. 미래는 필연적이지도 않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따라야 하는 무기력한 시공간도 아니다.

사실 미래에 대한 이미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람들의 미래 이미지는 아주 단순했다. 예를 들어 선사시대 수렵과 채집으로 생존했던 어느 조그만 부락에서 당신이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매일 열매를 모으거나 사냥을 하러 나갈 것이다. 이들에게 미래는 ‘나중에 다시 반복될’ 현재였다. ‘내일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농경사회가 도래했다. 인류는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햇빛을 받아 키우며, 가을에 추수하고, 그 곡식으로 겨울을 지내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시대에 미래의 이미지는 성장·쇠퇴·회복의 순환고리를 돌고 도는 것이었다. 너무 좋지도 너무 나쁘지도 않은, 너무 부유하지도 너무 가난하지도 않는 일정한 범위 내에서만 미래가 변동한다는 시각을 갖게 됐다. 지금은 어려워도 참고 견디다 보면 따듯한 봄날이 찾아온다는 순환적 미래관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뿌리가 깊다.

‘평평한’ 그리고 ‘순환하는’ 미래 이미지에 이어 ‘될 대로 되라(Que sera, sera)’는 미래관도 있다. 미래는 신(神)의 영역이기에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성경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 것이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마태복음 6:34)이라고 조언한다. 물론 여기서 언급한 성경의 지혜와는 다르지만 될 대로 되라는 미래의 이미지에는 미래란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렇듯 세 가지의 미래 이미지만 갖고 있던 인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300여 년 전,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고 열린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비밀 공식’을 발견한 것처럼 환희에 들떴다. 진보·발전·성장이란 단어를 써 가며 인류는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래서 과거와는 단절된 미래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근대의 미래, 산업자본주의의 미래였고 1940년대 후반부터 한국을 이끌어 온 미래이기도 했다.

성장의 미래는 사실상 세계로부터 공인된 미래의 이미지다. 어떤 사회나 기업도 성장의 미래만 추구한다는 뜻에서다.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소멸을 의미한다. 출산율이 떨어지면, 소득이 낮아지면, 소비가 감소하면 그건 비극이라는 얘기다. 설사 성장률이 다소 주춤하더라도 반드시 반전시켜 다시 성장 궤도로 진입해야 한다는, ‘지속 성장의 이미지’는 그래서 다른 대안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영원한 성장은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끊임없이 경제적인 성장을 추구하다 보면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놓칠 수 있고, 게다가 삶의 기쁨마저 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한 성장론자들 탓에 환경 파괴, 세계적 기근과 핵전쟁의 위험, 에너지 고갈로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었음을 경고하고 있다. 경제나 환경뿐 아니라 도덕마저 붕괴되고 있다는 증거가 증가하면서 ‘미래는 붕괴된다’는 이미지가 점차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심각한 문제들에 공감하면서도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우선 무자비한 성장을 멈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지속 가능한 사회, 공정한 사회, 평온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침체된 사회가 아닌 지적인 사회, 정신적인 성장도 도모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평온한 사회를 만들자는 게 세 번째 미래 이미지에 담겨 있다. 이런 이미지는 ‘생존(혹은 절제된) 사회’로 볼 수 있다.

끝으로 어떤 사람들은 붕괴처럼 보이는 게 사실은 새로운 사회로 변화돼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오래된 삶의 방식이 사라지고 전례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급속히 이행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 전에 없던 지성의 등장, 달이나 화성 혹은 해저 등 새로운 삶의 공간이 창조되면서 인류는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탈바꿈한다. 그 결과 21세기는 이전의 어떤 시공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의 급물살을 탈 것이다. 미국의 미래학자이자 과학자인 래이 커즈와일이 ‘특이점(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대)’이라고 부른 새로운 세상을 향해 빠르게 이동 중이다. 나는 이런 사회를 ‘변형사회’라고 표현한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인류는 첨단 기술로 새롭고 눈부신 창조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순간에 서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네 가지의 미래는 책상 위에서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실증적·경험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꽤 오래전, 미래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찾을 수 있는 미래의 이미지들을 연구했다. 정부의 정책 보고서나 기업의 전략 기획서뿐 아니라 소설·영화·광고·에세이 등에서 인류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변화시키는 미래의 이미지들을 찾아봤다. 방대한 미래의 이미지들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자칫 다양한 미래의 이미지가 주는 풍부한 메시지나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요소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네 가지의 미래(지속성장, 붕괴, 생존, 변형)와 적어도 하나 이상 겹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네 가지 미래는 미래학에서 ‘연역적 예측’으로 불리는 방법론의 기초로 사용된다. 네 가지의 일반적인 미래의 이미지로부터 현재의 시간으로 소급 적용해 들어가면 현재가 달리 보이게 된다. 예컨대 ‘가족’의 미래를 지속 성장의 이미지로 놓고 볼 때와 붕괴나 생존 혹은 변형의 미래 이미지로 놓고 볼 때 아주 달라진다. 이를 통해 가족의 미래에 대해 유용하고도 일관성 있는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네 가지 미래 중 어느 하나의 미래가 더 가능성이 있다거나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네 가지 미래는 모두 실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나름대로 존재가치가 있다. 변화의 쓰나미에 올라타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려면 네 가지 미래를 모두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미래를 한 가지 유형에 걸지 말아야 한다. 특히 미래는 지속 성장할 수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다 큰코다친 것이 엊그제 일이다.
번역=하와이 미래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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