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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옥인동 윤덕영의 아방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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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옥인동 47번지 언덕 위에 성채처럼 솟은 옛 윤덕영 저택(1950년께). 프랑스 귀족 저택의 설계도에 따라 1911년 짓기 시작한 이 집이 완공되는 데에는 10년이상 걸렸다.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 청사, 미군 숙소 등으로 쓰이다가 화재로 소실됐다. [사진 출처 : 서울육백년]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됨으로써 제후국 기준에 따라 99칸 이내로 묶여 있던 민가 건축 규제도 풀렸다.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 민영찬은 대뜸 안국동에 100칸이 넘는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나라 이름은 제국이라 했으나 아직 그에 걸맞은 황궁을 갖지 못한 고종은 그 소식에 살짝 빈정이 상했다. 민영찬을 불러 짐짓 화난 목소리로 다그쳤다. “네가 요즘 대궐을 짓고 있다면서?” 신하가 대궐을 짓는 것은 대역부도죄에 해당하니, 대답 여하에 따라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소신이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짓는 것은 절이옵니다”라고 둘러댔다. 고종은 재치 있는 대답이라 생각하고는 그대로 돌려 보냈다. 몇 달 후, 다시 그를 불러 물었다. “절은 다 지었느냐?” “예.” “그래 어느 부처님을 모셨느냐?” “세상 사람들이 절더러 금부처라 하옵니다.” 고종은 웃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후일 윤치소에게 넘어가 지금은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으로 알려져 있는 ‘장안제일가’의 ‘탄생 설화’다.

 호화주택은 언제나 있었다. 철종 말년부터 고종 초년까지는 ‘장안팔대가’가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옥으로 안국동 윤치소 집과 가회동 한상룡 집이, 양옥으로는 운현궁 이준용 집과 옥인동 윤덕영 집이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중에는 동대문 밖 임종상 집과 서대문 안 최창학 집도 유명세를 누렸다. 그런데 이들 중 ‘아방궁’이라는 별명을 얻은 집은 단 한 집,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의 집뿐이었다. 이 집은 ‘벽돌 한 개가 범연한 것이 없고 유리 한 장도 보통의 물품은 쓰지 아니’한 장안 제일의 호화주택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 때문에 아방궁이라 불린 것은 아니다.

 아방궁은 진시황이 70만 명의 포로와 죄수를 동원하고도 생전에 다 짓지 못한 궁이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중국 전역의 미인들을 끌어 모아 즐기기 위해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후 수천 년간 ‘사치와 향락’을 위한 건물의 대명사가 됐다.

 윤덕영은 세 가지로 유명했다. 특별히 주문 제작한 모자가 아니면 맞지 않을 만큼 머리가 커서 ‘윤대갈’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 하나요, 기생이나 여학생 첩을 옆에 끼고 ‘궁둥이를 두드리며 노는’ ‘고상한’ 취미가 둘이며, 옥인동의 저택이 셋이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서로 연결돼 있었다.

 대통령 퇴임 후의 사저 건축 예산이 공개될 때면 ‘아방궁’ 소리가 나오는 게 어느새 관행처럼 됐다. 그러나 이 말은 대통령을 호색한으로 매도하지 않는 이상 애초에 써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아방궁은 퇴폐 향락업소에나 어울리는 이름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