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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리더십 흔들리자 돈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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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호 22면

유로(euro)화는 꿈의 화폐로 불렸다. 저명한 영국 금융 이론가이면서 저널리스트인 월터 베지헛(1826~77)이 예상한 유럽 대륙의 단일 통화에 가까웠다. 사회주의 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1818~83)가 말한 ‘세계 화폐에도 가장 유사한 돈으로 평가됐다. 세계 화폐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인정받는 보편적 지불수단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했을 때 출현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이런 유로화가 흔들리고 있다. 사망 또는 온갖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유로존(유로 사용권)의 주변부인 그리스·아일랜드 등이 유로 체제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고 한다. 반대로 중심부인 독일과 프랑스가 뛰쳐나갈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도 나돌고 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전문가들이 유럽 재정위기를 이제 ‘유로위기(euro crisi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태가 국가부채 위기에서 단일 통화의 위기로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유로(euro), 사느냐 죽느냐

그 결과가 어떻든 유로 시스템 해체나 붕괴 논란은 탄생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유로는 화폐 단위로는 1999년 1월 1일 첫선을 보였다. 유로 지폐와 동전은 2002년 1월 1일 통용되기 시작했다. 99년을 기준으로 하면 유로 체제가 11년 만에 존폐의 갈림길에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마스트리흐트 조약 따라 11년 전 탄생
베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경제학)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어느 나라든 유로를 포기하면 신인도 하락 등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유로화를 포기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적잖은 전문가가 아이켄그린 교수에 동의했다. 자크 멜리츠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경제학)는 지난달 중앙SUNDAY에 쓴 칼럼에서 “미국 달러 체제도 유로화와 마찬가지로 경제 체력이 제각각인 주정부들의 단일 통화다”며 “일부 주정부가 파산했는데도 달러 체제가 붕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유로화 미래의 네 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첫 번째다. 유로화가 위기를 딛고 생존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그리스나 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이 유로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긴축과 침체 때문에 정치적 불안이 극심해지면 정치 리더는 결단해야 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위기 당사국의) 정치 리더들은 최악의 순간 단일 통화의 이점보다 자국 내 정치적 안정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최근 보도했다.

‘닥터 둠’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경제학)는 최근 경제분석 보고서에서 “그리스가 유로화를 포기할 확률은 30~35% 수준”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상품투자가인 짐 로저스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회원국이 하나 둘씩 이탈해 앞으로 25~30년 뒤에는 유로화가 종적을 감출 것”이라고 예상했다.

위기 당사국 리더가 단일 통화의 이점도 유지하면서 정치적 안정도 노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바로 세 번째 시나리오인 B급 화폐 발행이나 옛 통화 부활이다. 선례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1년 달러와 고정환율(페그)제로 묶여 있는 페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르헨티노’라는 돈을 찍어내 통화량을 늘려 경기회복을 꾀했다.

마지막은 유로존 중심부인 독일 등이 뛰쳐나가는 시나리오다. UC버클리대 하스비스니스스쿨의 앤드
루 로스 교수는 최근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웹진을 통해 발표한 글에서 “단일 통화를 포기한 데 따른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 나라가 유로 체제에서 뛰쳐나갈 수 있다”며 “과거 단일 통화 체제가 붕괴할 때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어떤 전문가도 유로화의 미래를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단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가 말한 대로 “지금까지는 아무도 유로체제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붕괴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유로화의 신성함이 의심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메르켈·융커·트리셰 유로 3인방 신경전
어쩌다 유로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시작은 재정난이지만 결정타는 정치 리더십이다. 유로호를 이끌 선장이 마땅찮았다는 얘기다. 유로화 위기의 단초를 앙겔라 메르켈(56) 독일 총리와 장 클로드 융커(56) 룩셈부르그 총리 겸 재무장관의 정면 충돌에서부터 찾는 것도 그래서다. 융커는 최근 “(메르켈이) 제안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절한 행태는 유럽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핏대를 세웠다. 메르켈이 구제금융 증액을 거부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융커는 메르켈이 차이를 극복하고 조화를 추구해온 유럽 공동체의 전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꼬집었다.

방아쇠는 메르켈이 당겼다. 그는 융커가 그리스와 아일랜드·스페인 등의 뜻을 모아 제안한 구제금융 증액안을 즉각 거부했다. 메르켈은 “스페인이 위기를 겪더라도 현재 유로존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조성한 7500억 유로(1125조원)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단일 채권인 유로채권(E-bond)을 발행하는 방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로채권은 개별 회원국이 아니라 유로존 전체의 이름으로 발행될 채권이다. 그리스와 아일랜드 등은 유로채권이 발행되면 재정위기 탓에 자국 채권 값이 떨어지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메르켈의 거부 명분은 긴장 이완이다. 그는 “유로채권을 발행하면 위기 회원국들의 긴축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충돌은 글로벌 시장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메르켈과 융커는 장 클로드 트리셰(68)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 함께 유로체제의 3인방이다. 메르켈은 유로존 정치 리더다. 융커는 유로존 재무장관 네트워크인 유로그룹 회장이다. 유로존 재정정책의 코디네이터인 셈이다. 두 사람은 그리스 위기가 발생한 지난해 11월 이후 환상의 짝꿍이란 평가를 들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두 사람의 단단한 공조 덕분에 유로존이 신속하게 구제금융을 조성해 집행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랬던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다. 금융전문 유로머니는 인터넷판에서 “은폐됐던 갈등이 불거진 것일 뿐”이라고 지난주 보도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유로체제의 중요한 적신호다. 트리셰는 이전부터 메르켈·융커와 자주 옥신각신했
다. 이런 상황에서 메르켈과 융커의 갈등은 유로 3인방 사이를 서로 벌어지게 했다.

현대 화폐 체제 최대의 적은 불신
전문가들은 구제금융 증액과 유로채권 발행을 유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추로 보고 있다. 이들 단추가 채워지지 않는 한 마지막인 네 번째 단추는 채워질 수 없다. 마지막 단추는 유로 16개 회원국 재정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다. 첫 번째는 ECB가 회원국 국채를 추가로 사들이는 처방이다. 그리스나 아일랜드 채권값을 유지시켜 두 나라의 자금 경색과 이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다. 현재 시행 중이다.

케네스 로고프 미국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9일 FT와의 인터뷰에서 “유로존 리더들이 구제금융 증액과 단일 채권 발행이 불가능하면 최후의 날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최후의 날은 유로체제 붕괴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유럽 통합의 아버지’인 헬무트 슈미트(92) 전 독일 총리가 발언하고 나섰다. 지난주 미 마켓워치와 인터뷰에서 “유로존 중심에서 리더십 공백이 발생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슈미트는 1974~82년 독일 총리를 지냈다. 그는 유럽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화폐를 하나로 묶는 초기 작업을 주도했다.

슈미트가 말한 리더십 공백은 현대 화폐 시스템의 최대 적이다. 요즘 화폐는 진화를 거듭해 사실상 신호(상징)가 됐다. 돈이 상품 화폐→주화→은행권→전자신호 순으로 진화했다는 얘기다. 이때 가장 중요한 버팀목은 한 국가나 연합체의 신뢰도다. 금이나 은·소금 같은 실물은 통화의 버팀목으로 충분하지 않다.

영국 화폐 역사가인 고(故) 글린 데이비스는 화폐의 역사에서 “가장 선진적인 돈은 국가나 연합체의 ‘말씀(Fiat·선언)’만으로 탄생해 유지된다”며 “그 말씀의 무게는 나라의 경제 상태뿐 아니라 정치적 리더십에 달렸다”고 말했다. ‘어떤 대상’을 돈이라고 선언한 국가나 연합체 리더들의 지도력이 통화의 생명력을 결정하는 변수라는 것이다. 이를 유로에 대입하면 지난주 발생한 유로 3인방의 갈등은 유로의 생명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긴축·침체 악순환 벌어질 수도
유로존은 재정위기만 문제가 아니다. 경제가 극단적으로 양극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구제금융 대가인 고강도 긴축 때문에 그리스와 아일랜드 경제가 침체의 늪으로 곤두박질했다. 빠르게 회복할 기미가 엿보이지 않는다. 허리띠 졸라매기가 끝나는 2015년 이후에나 경제가 수축에서 성장으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반면 독일 등 유로존 북부 지역은 금융위기 상흔을 빠르게 털어내고 있다. 올해 독일 경제는 3.7% 정도 성장할 전망이다. 91년 동·서독 통일 이후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유로존 경제의 양극화가 이미 진행 중이란 얘기다.

양극화로 그리스·아일랜드 등의 국민이 유로화를 사용하는 일이 더욱 부담스러워지고 있다. 유로존 주변부의 경제 체력을 감안하면 미국 달러 등과 견준 유로 환율은 10% 정도 올라야 한다(유로화 가치 하락). 그리스와 아일랜드 국민은 경제 체급보다 10% 정도 고평가된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 만큼 그리스 등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진다. 무역수지 악화를 피하기 어렵다. <그래프 참조>
독일은 경제 체력에 비춰 저평가돼 있는 유로화 때문에 높은 수출 경쟁력을 만끽하고 있다. 지금 중국이 경제 체력보다 저평가된 위안화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과 같다. 독일이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누린 이면에 이런 불편한 진실이 있었던 셈이다.

경제의 양극화는 유로 시스템의 지속성을 위협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그리스나 아일랜드가 고강도 긴축을 견디지 못할 수 있다. 긴축→침체→재정·무역 적자 누적→구제금융 추가 투입→긴축이라는 악순환을 견디다 못해 유로화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양극화는 또 유로존의 정치적 갈등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유로존 구성원들이 유·불리를 따지며 반목하면 정치 리더들도 한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실제 이번 주 금요일인 17일(현지시간) 열리는 유럽 정상회의가 격론의 장으로 돌변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애초 유럽 정상들은 이날 회동에서 항구적인 위기 구제 시스템 도입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하
지만 그리스와 스페인 등은 구제금융 증액과 유로채권 발행을 다시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메르켈이 다시 거부할지가 관심이다. 그가 두 가지 방안을 다시 거부한다면 글로벌 시장이 또 한 차례 격통을 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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