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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간섭 많았던 뉴딜벽화, 창의적 걸작은 못 남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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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호 08면

1 해방된 대지(1926~27),디에고 리베라(1886~1957) 작,프레스코,멕시코 국립 농업학교,멕시코시티2 말을 모는 레이첼 실버턴(1938),존 보샹(1906~1957) 작,WPA 뉴딜아트

“벽화에 누드를 그리는 사람은 뇌를 좀 검사해봐야 돼!”라고 에드워드 브루스(1879~1943)는 일갈했다. 그는 1930년대 초에 미국 재무부 산하 공공미술사업계획(Public Works of Art Project)을 지휘하고 있었다. 덕분에 30년대 미국 공공기관 벽화에서 나체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1933년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뉴딜(New Deal) 정책의 일환으로 예술 관련 뉴딜도 추진하고 있었다. 미술 관련 뉴딜의 첫째 사업이자 대표적인 사업은 국가에서 화가들을 고용해 우체국 등 공공기관에 벽화를 그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진 2>

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18> : 대공황이 불러온 뉴딜아트<下>

한 화가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루스벨트는 기막힌 아이디어라고 감탄했다. 빈곤에 시달리는 화가들에게 일자리를 줄 뿐 아니라 미술관에 갈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는 서민들도 진짜 그림을 실물로 볼 기회가 아닌가? 루스벨트는 곧 재무부에서 이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 재무부가 연방 건물의 건축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나중에 벽화 프로젝트는 뉴딜 사업을 총괄한 공공사업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으로 넘어갔다).

3 소작농 플로이드 버로우스의 집(1936),워커 에번스(1903~75) 작,흑백사진

재무부 산하 공공미술사업계획을 이끌게 된 브루스는 본래 성공한 변호사이자 금융업자였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 그 일을 그만뒀을 정도로 미술에 애정이 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뉴딜 벽화 프로젝트에서 브루스는 상당히 보수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에로틱한 것은 어림도 없었다. 누드는 무조건 에로틱한 것으로 간주됐다. 평소에 누드를 즐겨 그리던 한 화가가 벽화를 맡게 되자 당국은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평생 누드를 그렸으니 몇 점 덜 그린다고 선생의 미술 업적에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나체는 예외였는데 그것은 그저 서구 문명과 다른 존재-좋게 보면 자연의 순수성, 나쁘게 보면 야만-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대적 한계로 원주민과 흑인은 민중을 위한 뉴딜 벽화에서도 소외돼 있었다.

브루스 등 뉴딜 벽화 프로젝트 지휘자들은 추상화를 포함한 유럽 모더니즘풍 그림들도 배제했다.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 등 어둡고 자극적인 테마도 제외됐고, 정치적인 그림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뉴딜 벽화 프로젝트는 그 영감의 원천이 된 멕시코 벽화운동과 사뭇 달랐다. 멕시코 벽화운동을 이끈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그림(사진 1)을 보면 형태와 색채가 대담하고 에로틱하며 정치적인 메시지도 강하다.

반면에 뉴딜 벽화가 멕시코 벽화운동과 궤를 같이한 것은 지역의 토속적 정체성을 살리려 애썼다는 것이다. 뉴딜 벽화의 테마로는 미국적인 것, 미국 역사와 관계있는 것이 장려됐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의 기습을 발 빠르게 알린 여걸 레이철 실버톤을 그린 우체국 벽화(사진 2)는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뉴딜 벽화 프로젝트는 여러 제한 속에 온건한 작품들 위주로 가게 됐다(사진 2만 봐도 참 온건하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도발적인 부분이 있는 작품들은 곧 주민들의 항의에 부딪히게 되면서 더욱더 온건한 모습으로-거의 새마을운동 당시 건전가요 같은 모습으로-전개됐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가 미술가의 자유와 창의성을 빼앗아버리는 무용지물이라는 비난도 일어났다. 전위적인 작품이 배제됐기 때문에 사실 뉴딜 벽화는 후에 미국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특별히 괄목할 만한 작품을 남기지도 못했다.

뉴딜 아트에 대한 논란은 뉴딜 경제정책이 과연 성공적이었느냐에 대한 논란과 관련이 있다.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끝났고, 대공황이 끝난 결정적인 이유가 뉴딜보다는 세계대전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상당수 있다. 포화의 직격탄을 거의 받지 않은 미국이 유럽의 전쟁 물자와 전후 복구 물자 공급을 도맡으면서 미국 산업이 수요를 찾게 됐고, 또 1000만 명의 젊은이들이 유럽 전선으로 향하면서 실업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말이다.

심지어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뉴딜이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을 오히려 지연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재정지출은 한계가 있고 정부 간섭이 민간의 창의성과 경쟁을 억제해서 경제가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기능을 둔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뉴딜 벽화 프로젝트에서 창의적인 걸작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지난 글에서 말한 대로 뉴딜 아트의 명작은 오히려 농업안정국에서 추진한 다큐멘터리 사진 프로젝트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농업안정국이 고용된 사진가들에게 사회보장정책 홍보에 도움을 주는 것보다 기록을 남기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진 거장 워커 에번스(1903∼75)는 가난한 소작농의 집을 지극히 담담한 시선(사진 3)으로 찍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공공미술은 세금이 들어가는 미술이기 때문에 대중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작품마다 국민투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부나 공공위원회가 결정을 하면서 이들의 생각과 취향이 우선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미술사의 자유와 창의성은 훼손되기 쉽다.

그렇다면 공공미술은 무용지물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이 자본에 종속된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미술경매에서 미술작품이 상품이 되고 부유한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미술계가 좌우되는 것을 비판한다.사실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미술품의 가격은 꼭 돈, 물질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원하느냐를 수치로 계량화하는 것이다. 고로 시장에서 여러 사람이 욕망하지만 수가 한정된 예술작품의 경우, 그 욕구를 호가로 표현해 투명한 경쟁을 통해 최고가를 부르는 사람에게 작품이 가는 경매 시스템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들의 기호가 제대로 미술시장에 반영되느냐는 것, 그리고 기본적으로 돈이 없는 사람도 미술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공공미술의 필요성이 있다.

이렇듯 시장에 맡기느냐, 정부가 개입하느냐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예술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시장과 정부의 지원은 양쪽 다 예술의 순수성에 위험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이 없으면 예술이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영원한 딜레마로 남을 것이다.


문소영씨는 영자신문 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팀장이다. 경제학 석사로 일상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즐거움이다. 글도 쓰고 강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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