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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처음 방한한 글렌 로리 MoMA 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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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로리(56) 뉴욕 현대미술관(MoMA) 관장은 81년 역사를 지닌 이 미술관의 여섯 번째 관장이다. 하버드대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1995년 임명된 그는 관장 평균 재임기간을 훌쩍 넘겨 15년간 세계 현대미술의 보고(寶庫)인 이 미술관을 이끌고 있다. 미술전문지 아트리뷰는 글렌 로리 관장을 ‘2010 세계 미술계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 100인’ 중 5위에 올려놓았다. MoMA의 국내 파트너인 현대카드 초청으로 방한한 로리 관장을 만났다.

글=박현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한국에 처음 온 그는 “한국이 무척 궁금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뉴욕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한국·중국·인도 등 아시아 현대미술이 뜨는 현상이 장기적인 트렌드가 될까.

 “중국 미술 시장의 급부상은 새로운 걸 찾는 미술 세계의 특성과 중국 내 수요 증가에 따른 현상이다. 아시아 미술 시장이 언제까지 뜨거울 것인가는 예측하기 어렵다. 현대미술의 매력은 아무도 답을 모른다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음 100년간 아시아 작가들이 현대미술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리라는 점이다.”

●서구인들이 갖지 못한 시각이 장점인가.

 “요즘같이 정보가 넘치는 환경에서 과연 무엇이 창의성인가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개인의 전통적 경험을 세계적인 것으로 변환시켜 타문화 사람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를 실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훌륭한 아티스트의 요건이다.”

●뉴욕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아티스트를 꼽으면.

 “양혜규·서도호·이불 작가가 현대미술에 관한 대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작품이 매우 진지하고, 힘있고, 인상적이다. MoMA는 세작가의 작품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다른 유망한 아티스트도 찾고 있다.”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하는가.

 “서도호 작가는 매우 사적인 경험과 기억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어릴 적 집에 대한 기억을 주제로 한 작품은 비범했다. 반투명한 천을 사용해 옛 기억이나 환상을 완벽하게 그려냈고, 누구에게나 아련한 기억이 있는 집이란 공간을 현명하게 소재로 삼았다. 예술은 결국 소통인데, 성공한 예술가의 작품은 설득력 있고, 사려 깊고, 호감을 준다.”

●지난 15년간 미술 트렌드는 어떻게 변했는가.

 “15년 전 관장에 취임했을 때는 당대의 미술(contemporary art)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었다. 지금은 온통 화제가 컨템포러리 아트다. 또 당시엔 미술에 관한 논의는 유럽과 북미 중심이었다. 오늘날은 아시아·남미·북미·유럽·호주·아프리카 등으로 폭이 넓어졌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이 발달하고, 아트페어와 비엔날레가 많아지면서 미술이 대중에게 더 가까워졌다. 미술관 입장에서는 놓치면 안 되는 게 더 많아졌다. 무엇에 집중할 것인지 전략을 세우는 게 중요해졌다.”

●이런 다극(multipolar) 체제에서는 MoMA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을까.

 “양극(bipolar)의 시대로 알려졌던 시기에 MoMA는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시각의 새로운 미술관들이 세계 곳곳에 등장하는 건 환영할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리더십과 아이디어를 통해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관으로 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20세기 미술관의 평가 잣대가 컬렉션의 수준이었다면, 21세기에는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어떤 아이디어가 있었는가.

 “초기 현대미술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에 MoMA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다. 컬렉션의 무게를 20세기 전반에서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 옮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81년이나 된 MoMA를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방치된 공립학교에 세워진 PS1이라는 미술관과 2000년 합병했다. 컬렉션도 없는 작은 규모였지만, 생생하고 빠르고 색다른 접근방식을 높이 샀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길 기대했다.”

 이 대목에서 로리 관장은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란 경영 이론을 소개했다. “잘나가는 기관이 그 정점에 있을 때 신생 기관들이 새로 발굴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된다는 이론이다. 현대미술은 끊임없는 혼란 상태 속에 있어야 하는데, PS1은 MoMA에 그런 혼란과 자극을 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 밖에 어떤 변화를 꾀했나.

 “유능한 직원을 채용해 그들에게 리스크를 택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거대 집단의 특징중 하나는 리스크 회피 경향이 생긴다는 거다. 기존 명성에 누가 될 수 있는 모든 걸 피하자는 심리다. 그건 퇴보하는 지름길이다.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발전하는 길이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유일한 실수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위대한 기관, 학자, 아티스트들은 수많은 실수를 한다. 스스로를 털고 일어나‘다음’이라고 외치는 걸 배워야 한다.”

●실패에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

 “실수를 하면 벌하는 조직이 있고, 실수를 해도 지지받을 수 있는 조직도 있다. 실수에서 배우고,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전하는 분위기와 에너지를 만드는 게 리더가 할 일이다. 독창성, 대담함, 독특한 비전, 도전과 혁신이 필요한 MoMA 같은 곳에는 ‘안 돼도 괜찮아’라는 문화가 필요하다.”

●훌륭한 미술관이 되기 위한 조건은.

 “안목, 열정, 새로움을 추구하는 결단력, 더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자기 비판성을 꼽는다. 훌륭한 큐레이터와 그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훌륭한 미술관을 만드는 출발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그 의미를 아는 큐레이터가 제대로 전시하고, 다른 작품과 어우러지게 했을 때에만 작품의 잠재력이 살아난다.”

●결국은 사람이란 뜻인가.

 “어떤 작품을 확보할 것인가, 어떻게 전시할것이냐는 사람이 내리는 결정이다. 연구와 지식에는 지름길이 없다. 단시간 내에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얻을 수 있다. 어떤 경우도 미술관 자체가 큐레이터보다 훌륭할 순 없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미술품 가격이 작품 수집에 악영향을 주는가.

 “미술품 가격 상승이 미술관들에 엄청난 압박을 주는 게 사실이다. 시장보다 한 발 앞서는, 뛰어난 큐레이터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에 과감하게 돈을 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사회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작품 구입에 평균 연간 2500만~3000만 달러쯤 쓴다.”

●금융위기 이후 방문객이 늘었다고 하는데.

 “최근 2년 연속 방문객이 전년 대비 15%씩 늘었다. 위기 시에 사람들은 가치를 찾아 미술관에 온다. 적은 돈으로 하루 종일 미술·사진·영화를 보고, 먹고 마시고, 무엇보다 안전한 곳이다. 불확실성 시대에는 정서적, 지적, 육체적인 안전을 갈구한다. 비용 지출을 25%가량 줄여, 경제위기에도 MoMA는 더 강해졌다.”

●빠뜨리지 않고 들르는 미술관이 있다면.

 “난 미술관 중독이다. MoMA와 관심이 비슷한 파리의 퐁피두 센터, 베를린의 내셔널 갤러리, 런던의 테이트모던 같은 곳엔 늘 간다. 규모는 작지만 매력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곳에서도 배울 게 있다. 상파울루의 현대미술관,코펜하겐의 루이지애나, 리스본의 굴벤키언,
도쿄의 모리미술관, 서울의 리움 등이다.”

●초보 컬렉터들이 주의할 점은.

 “‘정찰에 보내는 시간은 허비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군사 격언이 있다. 작품을 감상하고, 자료를 찾고, 더 감상하고, 깊이 생각하라. 바로 행동에 옮기지 마라. 지식을 기반으로 행동하라. 큐레이터·딜러와 충분히 대화하고, 스스로 판단하되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라. 결국 자신에게 의미 있는 작품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영감을 받은 작품을 기억하는가.

 “지금도 생생하다. 여섯 살 때,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대학 도시에 살 때 부모님과 미술관에 갔다가 길을 잃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가인 비앙 부그로의 작품 앞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나를 어머니가 발견했다. 매우 아름다운 배경 속에 성인과 요정이 있는 그림이었는데, 내가 그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유체이탈의 경험을 다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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