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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슈에만 힘 쏟는 건 예술의 낭비, 예술가는 100년 지나도 남을 작품 남겨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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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만난 작가 쩡판즈는 약간 격앙돼 있었다. 두 달간의 전시회(8.12~10.12·상하이 와이탄 미술관)가 벌써 끝났다는 아쉬움 탓이다. 만나자마자 그는 “2년 동안 준비한 전시회가 고작 두 달 만에 끝나다니 엑스포처럼 6개월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두 달 동안 그는 아틀리에가 있는 베이징(北京)과 전시장인 상하이를 오가며 관람객에게 가이드를 자처했다고 한다. 중국 본토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늘 북적이는 와이탄 금융가에 미술관이 자리했던 터라 우연히 방문한 일반 관람객도 많았는데, 작가를 잘 모르는 일반인이 감동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아는 사람들이야 인사치레일 수 있지만 일반 대중의 감탄은 훨씬 진솔하게 다가왔다는 것. “이번 전시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 왔습니다. 1930년대 자연사박물관을 개조한 미술관의 과거 역사와 서양미술사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기독교적 역사를 염두에 두고 동물을 통해 생명과 죽음의 순환 구조를 이야기했죠.”

전시를 함께 기획했던 아트미아의 진현미(41) 대표는 공간과 작품을 연결해 컨셉트를 잡고 작품 몰입에 도움이 되도록 전시장 내 음악까지 손수 골랐다며 작가가 이 전시에 들인 공이 얼마나 컸는지 귀띔했다. 수려한 외모와 강렬한 눈매, 스타일리시한 패션감각, 글로벌한 매너, 게다가 고급스럽고 예민한 인테리어와 시가 등을 즐기는 취미 생활까지. 중국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화이트칼라 예술가’다. 방만한 생활이나 영감에 사로잡혀 밤을 후루룩 새우는 무절제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성공한 작가 중에 자기복제를 하는 작가들이 많아요. 친구나 친척들이 한 점만 하고 부탁하니까, 정 때문에 마지못해 그려 주죠. 그런 면에서 자기관리와 절제가 뛰어난 작가예요.” 자신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 준 ‘가면 시리즈’가 정점을 달릴 때 작가는 더 이상 이 시리즈를 그리지 않겠다고 붓을 꺾었다. “컬렉터들이 사 달라고 줄을 섰는데, 잘 팔리는 그림을 작가가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고 하는 건 갤러리스트에게는 당연히 손해죠. 하지만 작가의 판단을 존중했어요. 그 이유가 극히 타당했으니까.”

93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촌놈의 공포감과 두려움 같은 복잡한 심리를 감추기 위해 작품 속에 등장한 것이 마스크인데, 베이징에 적응하고 세상에 당당해지니 마스크를 벗었던 것. 이제 그 정서가 없으니 정서에 위배된 그림은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의 충실한 감정은 지난 십수 년간 시기마다 작품에 변화를 가져왔다. 병원 풍경과 푸줏간 고기를 그렸던 초기작, 앞서 말한 마스크 시리즈와 최근작 선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와 표현방식은 작가의 내면을 따라 변화돼 왔다. ‘폴리티컬 팝’으로 대표되는 중국 현대미술의 일련의 흐름과 달리 쩡판즈는 정치를 철저하게 외면했던 셈인데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작품에 사회적 이슈가 들어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나는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것만을 고려한다. 사회적 이슈를 기억하고 말하는 건 고작 10년 정도다. 100년 뒤, 200년 뒤 사회적 이슈는 잊혀진 채 작품의 심미적인 것만을 평가할 뿐이다. 작품의 시간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채 많은 작가가 작품에 사회적 이슈를 반영하는데, 예술적 정력을 여기에 쏟는 건 예술의 낭비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심미안을 일깨워 준 사람은 어머니다. 작가의 어머니는 가난한 시절에도 동네에 양식당이 개점하면 시계를 팔아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그 시절 ‘컬처맘’이었다. 철마다 피는 꽃의 향기를 맡게 했고, 여행을 통해 오감을 일깨워 줬다. 언제나 신경 써서 단장해 주는 어머니 덕에 그는 항상 반에서 눈에 띄는 아이였는데, 수줍은 성격 탓에 이것이 오히려 고통이었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대답하지 못했던 것. 선생님이 말을 거는 순간 머릿속이 빙빙 돌고 속이 울렁거려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늘 ‘얼굴은 곱상한데 쓸모없는 바보’ 소리를 들어야 했다. 모범생 표시인 빨간 스카프를 졸업할 때까지 못 받은 건 전교에 혼자뿐이었다.

이런 ‘열등생’이 대학에 들어가 미술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대학 입학날의 자신감이야말로 지금의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큰 자양분이 됐다. 빨간 스카프에 대한 아픈 기억을 이제는 추억처럼 웃으며 말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정신의 품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에게 가장 최근에 팔린 작품의 가격을 물었다. “별로 안 팔아 잘 모르겠다”며 웃는다(최근 공개된 작품 가격은 지난 6월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에서 팔린 20억원).“작품이 얼마에 팔렸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중요한 건 작품의 창조력이다. 대중의 나에 대한 기대는 까다로워지고 더욱 높아졌다. 진부함은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세속적인 성공과 명예를 떠나 예술세계에 빠져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야 나 자신이 상처받지 않을 것 같다.”

세속적인 잣대로 모든 걸 다 가진 작가는 소박한 작가적 삶으로의 회귀를 얘기했다. 그러면서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명예로운 근황을 함께 전했다. 이번 상하이 전시작 중 네 작품을 조만간 파리와 베네치아 최고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아직 계약 상태라 거래가 성사된 건 아니니 박물관과 미술관의 이름을 밝힐 순 없다고 했지만 짐작은 갔다. 이제 막 도착한 독일의 저명한 출판사 하체 칸츠(Hatje Cantz)에서 출간된 도록 역시 명예로운 일이라고 했다. 샘플로 아직 수중에 한 권뿐이라는 도록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설명과 함께 보여 주고는 바로 옆구리에 끼었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같이 맑아 빙긋 웃음이 났다. 부유해지면 예술혼을 잃게 마련이라는 성급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준 쩡판즈 작가와 눈앞의 이익보다 예술가의 진정성을 믿는 갤러리스트 진현미 대표. 배짱 맞는 두 사람은 벌써 다음 전시를 기획 중이다. 진 대표의 아트 디렉팅으로 내년 10월께 항저우(杭州) 저장(浙江)성 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서호 10경을 노래한 문인들의 시구에서 영감을 얻은, 항저우의 인문·역사에 부합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상하이 전시는 끝났지만 상하이 와이탄 미술관에서 50m쯤 떨어진 유니언 처치(Union Church)에 유일하게 전시됐던 쩡판즈의 작품 마리아는 이달 말 엑스포가 끝날 때까지 같은 장소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베이징 사진 문덕관(studio lamp), 쩡판즈 제공

쩡판즈 1964년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 출생. 91년 후베이미술학원 유화과 졸업. 가장 주목받는 3세대 중국 현대미술의 선두 주자로 그의 그림은 매 해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94년 시작해 다양한 패턴으로 수년간 지속된 가면 시리즈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작품에서 정치색을 배제한 대신 중국 현대사 속에 처한 자신과 사람들 심리에 집중한 그의 그림은 어떤 정치적 모티브보다 많은 사람에게 진실한 감동을 선사해 주고 있다.

진현미 대표 베이징 다산쯔 차오창디 예술구에서 자신의 브랜드 ‘아트미아’ 화랑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블루칩 작가들과 교유하며 아트미아를 베이징의 메이저 화랑 대열에 합류시켰다. 쩡판즈 작가와는 베이징 다산쯔 차오창디 예술구에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틀리에와 갤러리가 이웃해 있는 이웃사촌이자 비즈니스 파트너다.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레몬트리’에 중국 대표 작가들의 아틀리에를 소개하는 ‘베이징 아트 산책’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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