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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의 레저 터치] 허다한 길, 수많은 주인, 잡다한 소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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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

길이 넘쳐난다. 걷기 여행 열풍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새 길이 나고 있다. 길을 내는 주체도 넘쳐난다. 제주올레는 민간 단체가 닦았고, 변산 마실길은 해당 지자체 그러니까 전북 부안군청이 조성했다. 특히 지자체는 길을 내는데 가장 억척이다. 길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인식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정부 부처도 열풍에 기꺼이 동참하고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물론이고, 국토해양부·환경부·산림청 등도 저마다 길을 거느리고 있다.

 길이 넘쳐나고 길을 내는 주체도 넘쳐나다 보니, 막상 길 위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좋은 예가 있다. 북한산 둘레길과 지리산숲길 얘기부터 하자. 두 트레일 모두 국립공원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성질은 전혀 다르다.

 이유는 길을 낸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북한산국립공원 관리공단이 냈다. 그래서 트레일 대부분이 국립공원 경계의 안쪽을 통과한다. 반면에 지리산숲길은 국립공원 경계 바깥에 대부분 몰려 있다. 지리산숲길을 운영하는 ㈔숲길은, 지리산숲길의 원칙이 지리산을 둘러싼 마을을 잇는 길이어서라고 설명하지만 여기엔 남모를 사정도 있다. 지리산숲길의 예산은 산림청에서 나온다. 지리산숲길은 산림청 사업이어서 환경부 관할인 국립공원 안쪽을 자유로이 넘나들기 어려웠다.

 지리산숲길이란 이름도 이참에 따져야겠다. 지리산숲길 하니까 잘 알아듣지 못하는 분이 많으실 게다. 죄다 지리산둘레길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 다시 말하지만 지리산을 빙 둘러싸며 잇고 있는 길의 공식명칭은 지리산숲길이다. 원래는 지리산길이었는데, 산림청이 주관부서가 되면서 이름에 ‘숲’이 들어갔다.

 똑같은 길인데 다르게 불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동해안을 잇는 해파랑길을 발표했는데, 이 길 대부분이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해안누리길이다. 특히 부산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넘는 길은, 해파랑길이자 해안누리길이자 해운대구청이 지정한 문탠로드이자 대한민국 경관도로다.

 정부 부처마다 전국의 좋은 길을 선정ㆍ발표하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전국의 좋은 길에 뽑히려면 해당 지자체가 먼저 신청을 해야 한다. 그러면 부처는 좋은 길을 골라 지자체에 예산을 내려보낸다. 바로 이 대목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지자체는 자기네 지역 안에 있는 길만 신청한다. 그래야 예산을 한껏 쓸 수 있다. 나랏님이 좋다고 보증하는 길 중에서 경계를 건너는 고갯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신경준의 『산경표』에 나오는 글귀다. 그러나 우리나라 길의 주인은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다. 트레일을 조성한 수많은 주체다. 그래서 길마다 시끄럽다. 참고로 영국은 ‘내셔널 트레일’ 딱 하나가 있다. 내셔널 트레일 안에 4000㎞가 넘는 전국의 트레일이 관리되고 운영된다. 우리네 길도 한번쯤 정리할 때가 됐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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