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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샐틈없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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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

내일(12월 9일)은 영어권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존 밀턴(1608~1674)의 탄생 402주년이 되는 날이다. 탄생 400주년이던 2008년에는 영어권 여러 나라에서 시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굵직한 문화 행사들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지극히 영어를 사랑하는 우리 사회는 기이하게도 1년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든 가치를 돈벌이의 하위 개념으로 종속시키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삭막한 풍경이었다.

 밀턴이 40대 중반에 눈병으로 시력을 잃었고, 그의 『실낙원』이 만년에 실명 상태에서 집필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밀턴이 청교도 혁명에서 찰스 1세의 처형을 적극 옹호한 공화주의 혁명 논객이자 크롬웰 정부에서 10년간 외무부 장관직을 수행한 인물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밀턴은 혁명정부의 대변인이었고, 왕권신수설이 주장되던 시대에 국왕 살해의 공화주의는 몹쓸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청교도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참수형을 당한 찰스 1세의 장남 찰스 2세가 1660년 복귀함으로써 복고왕정이 시작됐다. ‘반역자’ 밀턴은 한동안 감옥살이를 했지만 새 정부의 관용정책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다. 내부적 망명자 신세가 된 밀턴은 은둔한 채 서사시 집필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때 새 정부는 넌지시 밀턴에게 외무부 장관직을 권유하며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새 정부로서는 ‘악명 높은’ 밀턴을 전향시켜 국왕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비할 데 없는 쾌거일 터였다.

 당시 밀턴의 처지는 몹시 궁했다. 증권 형태로 보유하고 있던 전 재산을 왕정복고의 혼란 통에 대부분 날렸고, 부양해야 할 아내와 어린 세 딸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앞 못 보는 늙은 장애인 신세였다. 그럼에도 밀턴은 국왕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밀턴의 자택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국왕 찰스 2세의 동생이자 왕위계승권자인 제임스(나중에 제임스 2세)였다.

 제임스는 어느 날 형 찰스 2세에게 밀턴을 한번 만나봐도 좋겠냐고 승낙을 구했다. 왕은 동생의 호기심을 막을 생각이 없다며 기꺼이 허락했다. 얼마 후 제임스는 밀턴의 거처를 개인적으로 방문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제임스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밀턴의 실명이 그의 혁명 활동에 대한 ‘천벌(天罰)’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손님의 무례한 질문에 밀턴은 답했다. “만일 전하께서 저의 실명을 하늘이 진노하신 징후라고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부친이신 선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하늘은 저보다는 부친께 훨씬 더 불쾌하셨던 게지요.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이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밀턴은 “나의 실명이 하늘의 벌이라면, 당신 아버지는 얼마나 큰 천벌을 받았기에 목 잘리는 참수형을 당했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화가 난 제임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왕궁에 돌아오자마자 밀턴 같은 사악한 자를 교수형 시키지 않은 것은 큰 실수라고 왕에게 따졌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왕은 밀턴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냐고 물었다. “늙고 가난했습니다.” “늙고 가난하다고? 게다가 그는 앞도 못 보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딱정벌레 같은 장님이었습니다.” “제임스, 그를 교수형 시키길 원하다니, 어쩌면 그토록 어리석은가? 그를 목매달아 죽이면 불행에서 구해주는 꼴이지. 그냥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게.”

 ‘권력’ 앞에서 밀리지 않은 밀턴의 기개가 놀랍다. 하지만 얼마든지 밀턴을 죽일 수 있었으면서도 살려둔 찰스 2세의 관용도 대단하다. 악담을 퍼부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동생을 타이르고 더 이상 밀턴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실낙원』 탄생에 기여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찰스 2세는 죽을 때까지 왕위를 지켰지만 후계자인 제임스 2세는 의회의 저항으로 왕좌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명예혁명(1688)이다.

 연평도 피격으로 묻혔지만 총리실 민간인사찰 및 청와대 대포폰 의혹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정부가 소통과 설득 대신 ‘정보 정치’를 통해 반대세력을 압박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렇게까지 물샐틈없이 발본색원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전제군주마저도 반대 의견을 눈 질끈 감고 넘어가는 아량과 여유가 있었다. 정작 물샐틈없이 막아내야 할 상대는 따로 있지 않은가. 북의 김정일 정권 말이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