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머지 평론]전직 앵커들의 후안무치

중앙일보

입력

“이달 3일 오후 6시에 진고개서 어떤 한국 사람 하나가 행위를 어떻게 하였는지 일본 사람 수십 명이 모여서 무수 난타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한국 순검이 그 맞은 사람을 잡아 경무청으로 갔다더라.”
1899년 11월 9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일본인들이 어느 한국인에게 집단 린치를 가하였고 이 한국인은 빈사상태에 이르러서도 병원으로 가지 못하고 취조를 받기 위해 경무청으로 가고 있다. 이 짧은 글 속에 亡國의 길로 접어든 조선의 100년 전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하다. 지금 이런 사건이 벌어진다면 어떠할까?

맞은 사람은 우선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하고, 적어도 구타한 자들을 경찰서에 끌고 가겠지. 그럼 이 사건에 대해 요즘 신문은 어떻게 보도할까? 왜 그 한국인이 맞았는지 상세히 밝혀 주고, 서술 스타일도 ‘갔다더라’식 대신 ‘갔다’라고 하겠지. 우리는 ‘했다더라’식의 서술이 객관적 사실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근거 없는 소문을 무책임하게 옮기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했다더라’식의 표현이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려 다른 이에게 전해 줄 때 사용하는 것이라면, 요즘의 신문과 방송에서 사용하는 ‘하였다’의 표현은 일어난 사건 그대로를 투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하였다’라고 보도한 사건을 신문기자나 뉴스 프로그램의 담당자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자기들이 실제 목격하지도 않은 사건을 어떻게 생생하게 경험한 것처럼 쓰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기자나 뉴스앵커는 남들이 전해 준 사건 이야기를 또 다시 전달해 주는 이가 아니던가? 개인적인 솔직성만을 문제삼는다면, 신문기자와 뉴스앵커는 지금의 ‘하였다’식의 표현대신 100년 전의 《독립신문》처럼 ‘했다더라’식으로 사건을 전달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현대의 미디어 중에서 ‘했다더라’식으로 보도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미디어는 우스꽝스런 몰골을 하고 코미디의 소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전달자의 개인적 차원에서는 목격하지도 않은 일을 마치 일어난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일어난 사실 그 자체’로 탈바꿈시키는가?

그것은 객관적 사실을 ‘제조’하고, 그 ‘사실’의 거울 같은 전달을 믿게 하는 미디어의 힘에 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디어는 공정성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믿음직한’ 취재자, ‘신뢰할 만한’ 정보원, ‘신빙성 있는’ 전달방법 모두를 빈틈없이 묶어 ‘사실 그 자체’를 생생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는 ‘신앙심’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미디어가 있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한다’는 이 신앙심에 대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되면, 미디어는 드디어 객관적 사실의 殿堂으로서 현대사회에서 신뢰성의 헤게모니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일어난 그대로를 보여 준다’는 미디어의 주장이 더욱 힘을 얻는 곳은 사건현장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여지는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당신이 직접 보고 있으므로 우리의 보도가 믿을 만하다는 것을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뉴스 앵커의 말은 누구나 화면을 직접 보면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일어난 사건 그 자체가 아무 ‘사심 없이’ 전달되고 있음을 모두가 ‘믿을’ 수 있다.

그래서 뉴스 프로그램의 담당자인 앵커는 바로 우리 사회의 공정성과 객관성, 그리고 신뢰성의 상징으로 부각된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로서 앵커는 우리 속에 자리잡는다. 곧 텔레비전의 뉴스앵커는 우리 사회에서 미디어의 신뢰성 메커니즘을 대변하며, 이 체제가 제대로 작동되는 데 매우 중요한 고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몇 년 전 선거철을 앞두고 텔레비전 방송국의 황금시간대 뉴스 프로그램 앵커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여당과 야당의 대변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들은 앵커였던 시절의 목소리와 표정을 그대로 지닌 채, 이제는 특정정당의 이해를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에게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정보를 알려 준다고 인식되면서 얻게 된 자신의 이미지를 무기로 삼아, 전직 앵커들은 상대 정당의 당파주의와 편협성을 폭로하는 선봉에 서게 되었다. 한때 신뢰성을 제조하는 미디어의 공장에서 간판스타로 내세워지며 신뢰성의 저장고 역할을 하던 이들이 이제 상대방을 비난하며 서로의 신뢰성에 흠집을 내기에 안간힘을 다하였다.

이들의 변신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스런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혼란의 느낌은 쾌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에 사람들은 무질서를 정리할 방법을 찾게 마련이었다. 한 가지 방법은 자신만이 믿을 만하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는 이들 중에서, 한 명을 고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이전과는 달라진 전직 앵커들의 변절을 비난하며 자신이 그들에게 주었던 신뢰성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많은 이들이 첫 번째의 경우를 택하고, 그렇게 신뢰받은 이가 자기 정당 소속이라면, 앵커를 스카웃한 작전은 성공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선택이 많을 경우, 앵커를 이용하여 자기 정당의 신뢰성을 높이려던 계획은 여야의 구분 없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의 선택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는가?

넥타이를 맨 전직 앵커들이 권력쟁탈의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는 동안, 어여쁘고 당차기로 유명한 어느 전직 여성 앵커는 재벌회사의 자동차를 선전하는 광고에 등장했다. 남자 앵커들이 ‘우리 당을 무조건 믿고 찍으세요’의 전략에 동원되었다면, 이 여자 앵커는 ‘우리 차를 무조건 믿고 사세요’의 작전에 쓰임을 받은 셈이다. 이 광고는 뉴스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 마치 광고내용이 뉴스처럼 공정하고 객관적인 양 보이게 하였다. 이 경우에도 시청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나는 ‘믿을’ 만한 그녀가 예전의 ‘믿을’ 만한 방식으로 전해 주는 정보이니 당연히 ‘믿을’ 만하겠다는 것으로, 광고회사가 기대하는 반응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녀의 광고출연을 뉴스앵커라는 자신의 전직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신뢰성을 팔아 버리는 행위로 보고 역겨움을 느끼는 입장이다. 광고회사에서는 차를 살 만한 여유가 있는 계층이 어느 쪽에 기울까에 관심이 쏠릴 터이고, 광고효과도 그 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우리 사회에서 앵커들이 줄줄이 정치권력과 돈의 대변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풍토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

앵커는 미디어가 제조한 공정성과 신뢰성의 상징이다.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한번 앵커였던 이는 앵커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감추어져 있는 신뢰성 제조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대신, 전달해 주는 앵커의 개인적 자질 안에서 신뢰성의 비밀을 찾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러한 성향은 바로 미디어의 신뢰성 생산 장치가 숨어서 잘 작동되도록 하는 데 긴요하다.

권력이 작동되어 나타난 하나의 효과를 권력의 원천이라고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은폐장치가 잘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신뢰와 공정의 대명사로 앵커가 뜨는 것은 미디어 쪽에서 볼 때, 반가운 일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한번 앵커는 영원한 앵커’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은 영원한 미디어의 편이다. 이들은 드라마 속에서의 죽음도 현실의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미디어는 그들의 소박한 기대를 한번도 배반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기들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리고 권력과 부의 시녀로 전락하였노라고 앵커들의 변절을 나무라는 이들은 어떤가? 언뜻 보면 미디어는 이들의 까탈스러움에 짜증을 낼 만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미디어의 신뢰성 장치가 제대로 움직이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변절했다고 여겨지는 이에게 초점을 맞추느라고 어떤 뉴스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지에 관한 관심은 떠오를 수조차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묘하게도 까다롭게 구는 이들이 단순소박한 이보다 미디어가 편안하게 지내는 데 이로울 수 있다.

문제는 전직 앵커들이 변신을 통해 연이어 우리의 관심 대상으로 등장하면서,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거나 희미하게 떠오르던 측면을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앵커들이 택한 정당이나 재벌기업이니까 당연히 믿을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지도 않고, 그들의 후안무치한 변절을 성토하지도 않는다. 대신 앵커였던 시절에는 숨겨 놓았던 심중을 이제 솔직히 드러내 보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앵커들은 겉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고자 애쓰면서 실상은 정치권력과 재벌의 부에 소속되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 따르면, 지금 드러난 전직 앵커들의 모습은 변절이 아니라 본래의 진면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아직 앵커 개인의 차원에 쏠려 있기 때문에 덜 위협적이다.

그러나 이제 뉴스 미디어 자체가 내재적으로 권력權力과 金力에 유착될 수밖에 없으므로 앵커들의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한다면, 문제는 조금 심각해진다. 돈과 정치권력에 대한 앵커 개인의 편향성이 논의의 초점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편향성이 도마 위로 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점이동이 일어나면, 미디어가 견고하게 간직하던 정당성의 헤게모니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안락하던 미디어 체제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시달려야 한다.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보도할 가치가 있는 뉴스를 선별하는가?” “어째서 이 뉴스의 전달 순서가 저 뉴스보다 나중에 이루어졌는가?” “왜 이것은 다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졌는가?” 이런 ‘쩨쩨한’ 질문과 함께 다음의 논고를 듣게 된다.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 눈길 주는 방식, 몸동작에서 당신은 구제불능할 정도로 공정성과 객관성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우리는 당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다. 벌거벗은 미디어를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체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웃는 아이를 퇴장시키고 옷을 입혀 드려야 한다. 어떻게? 물론 앵커들을 단속해서!

미디어가 입고 싶어하는 신뢰성의 옷을 그대로 입혀 드리기 위해서 앵커들은 처신을 조심해야 한다. 자기들이 이제는 뉴스 담당자가 아니라고 해서 제멋대로 행동하다가는 누구나 ‘믿어’ 마지않는 미디어의 신뢰성에 금가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앵커 했다고 평생 그 굴레를 쓰고 있으란 말이냐?” 하고 항의를 해도 어쩔 수 없다.

개인적 권리의 최대한 보장을 작동원리로 하는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개인의 권리는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앵커를 자기 정당의 대변인으로 쓰려는 정치집단이나 전직 앵커로 하여금 뉴스처럼 자동차 선전을 말하게 하는 광고회사에 말하고 싶다. 정치와 광고를 좀 차원 높게 하라고 말이다. 저질스럽게 하더라도 자기들이 뿌리박고 있는 체제를 흔들지는 말고 하라고 말이다. 마구 흔들어대고 있으면서 흔들고 있다는 점도 깨닫지 못하고 순진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말이다.

●장석만/자유기고가, 종교철학박사

이머지새천년(http://emerge.joongang.co.kr) 1999.10.1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