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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지평론]지식인의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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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지식인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선비’라는 개념이 있었다. 지식인이란 프랑스어 ‘les intellectuels’에 해당한다.

지식인이란 개념은 학자와는 다르다. 학자란 ‘진리’를 찾는 사람이고 지식인은 ‘진실’을 찾는 사람이다. 진리란 세계에 대한 올바른 表象을 뜻한다. 세계가 바로 그러한 대로,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진리이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 것을 이다라고 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진리이다.”라고 말했다. 이 세계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능한intelligible 것이라면, 바로 이 세계를 이해하는 지성적인intelligent 인간이 학자인 것이다.

이 학자라는 개념도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학자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학자로 대별된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학자, 즉 철학자는 이 세계를 총체적이고 근원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 사회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원인(맥락에 따라 원리, 실체, 본질, 실재 등)
을 밝히고자 했다. 근대 이후 철학은 갖가지 과학들로 분절되었으며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자가 탄생했다. 과학자는 세계를 부분적이고 실증적으로 연구한다. 즉, 일정한 영역을 잡아(과학자에게 자신의 ‘전공’이 아닌 영역은 관심 밖이다)
실증주의적 바탕 위에서 연구한다(실증적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문제는 과학자들의 관심 밖이다)
.

반면 지식인이란 개념은 현대의 산물이다. 프랑스의 경우, 이 말은 특히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현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사건이란 곧 드레퓌스 사건이다. 드레퓌스 사건에 관련해 에밀 졸라를 비롯한 많은 문인, 학자, 언론인 등이 기존 세력(군벌, 관료 등)
에 대항해 하나의 戰線을 구축했을 때, 현대적 의미에서의 지식인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지식인이란 관료, 재벌, 군벌 등의 기득권 세력에 맞서 형이상학적 가치와 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학자, 예술가, 언론인 등의 집합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1996년에 나온 《프랑스 지식인 사전》1)의 서문에서는 지식인을 ‘사회 전체를 향해 분석, 방향, 도덕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에서 지식인이란 ‘선비’에 해당한다. 선비란 王權을 견제하면서 백성의 아픔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로서, 선비라는 개념이 뚜렷한 형태로 형성된 것은 조선 초기에 기존 권력에 대항했던 일단의 성리학자들과 더불어서였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의 지식인像은 성리학적 토대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한국의 선비들은 서구 열강들,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어왔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지식인은 특히 4.19 의거와 관련해 형성되었고, 그 후 軍政시절 독재에 저항하면서 그 확고한 정체성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선비/지식인 개념도 대체적으로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 개념에 일치한다.

다시 말해 지식인이란 이론적인 의미에서의 진리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물론 이 개념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진실을 찾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차라리 ‘진실인’ 또는 ‘양심인’이라는 번역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지식인이란 전문가와도 다르다. 전문가라는 개념은 대학이라는 제도와 뗄 수 없는 관련을 맺는다. 전통사회에도 전문가는 있었으나, 근대 이후 지식의 폭발적인 증대와 정교화를 경험하면서 이제 일반대중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전문적인 지식의 담지자가 요청되기 시작했다. 이후 대학 및 교수/전문가는 폭발적으로 증대되기 시작했으며, 그 자체가 사회의 거대한 권력 집단으로 화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의사, 물리학자, 경제학자, 심리학자 등을 본다.

지금까지 학자-전문가와 지식인은 대체적으로 동일시되어 왔다. 즉, 대학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 대체적으로 지식인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두드러진 현상들 중의 하나는 전문가-학자와 지식인의 분리일 것이다. 지식인 사회는 90년대에 거대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대학의 비리가 백일하에 폭로되고, 교수들의 부도덕한 행위들이 드러나면서 ‘대학’이나 ‘교수’라는 말을 둘러싸고 있었던 光輝는 단번에 사라진 것이다(‘대학생’ 개념은 노태우 정권 당시의 폭발적인 정원 확대와 더불어 이미 땅에 떨어졌다)
.

이제 전문가와 교수는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특정한 전문분야의 담당자일 뿐이며, 지금까지의 지식인 개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특히 학부제 실시 이후 대학이란 ‘전공’의 상품가치에 따라 학생들이 분포되는 하나의 市場이 되었으며(대학에서 걸핏하면 ‘학생은 고객’이니 ‘경영 마인드’니 하는 말을 듣는다)
, 교수 사회는 각자의 전공을 고수하면서 도제살이를 통해 제자를 길러내는 특정한 형태의 이익집단일 뿐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대학은 이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최근에 발생한 이런 흐름들이 다시 역전될 가능성이 있는가? 필자는 부정적으로 대답하고 싶다. 최근에 대학이라는 공간에 침투한 ‘시장경제’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며, 학과의 통폐합, 대학 자체의 폐교 같은 ‘구조조정’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얼마나 빨리 또 얼마나 큰 규모로 이루어질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정부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공간은 아니며, 대학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에 집착하는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흐름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지식인 사회의 위기는 이러한 외면적 붕괴가 전부는 아니다. 내면적 정체성이 확고할 때, 외면적 도전은 오히려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저항의 대상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눈앞에 적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 우리의 눈동자도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인들의 붕괴는 내면적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출신학교와 전공으로 갈리어 서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 사회문제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인간들, 특히 삶 자체에 대해 냉소적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아가 기성 교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로 무장한 지금의 대학원생들이 교수가 될 때쯤이면 사태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인이란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회, 어떤 시대에도 문제는 있게 마련이며, 사회와 역사의 핵심적인 문제가 있는 한 그 문제에 대처하고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지식인 집단은 늘 있어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형태의 지식인 집단은 무너졌으나, 우리 사회 곳곳에 지식인들은 포진해 있다. 만일 어떤 환경미화원이 노동계의 비리에 눈떠 그 현실에 저항하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 대중이 아닌 지식인이 된 것이다. 오늘날 지식인이란 개념은 학자나 전문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과의 변별성을 통해 규정될 수 있는 개념이다. 결국 오늘날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지식인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계열화됨으로써 사회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 지식인 사회가 정체성의 동요에 처해 있다면, 그것은 특히 90년대에 들어와 변화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새로운 지식인像을 창조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생명체와도 같다. 딱딱한 물리적 대상처럼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해 가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에 적절하게 적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학 사회나 지식인 집단은 80년대로부터 90년대로의 시대적 변환을 적절하게 흡수하고 대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90년대라는 시대를 적절하게 개념화했는가를 물어볼 수 있다. 70, 80년대 상황을 변증법이라는 개념틀로 치열하게 분석했듯이, 그렇게 90년대라는 상황을 새롭게 분석했는가의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가지 빗나간 방향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이미 변화한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80년대의 사유, 즉 변증법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시대를 사유하기를 게을리한 방향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흐름은 변증법을 고수한 데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변증법이란 무엇보다도 역사를 부단한 변화로 보고 그 변화를 사유하고자 하는 사상이며, 또 스스로를 고착화시키기보다는 저항세력을 대변하는 지식인의 '큰 목소리'가 필요하다.

즉 ‘형이상학’이기보다는 끝없는 역동성을 담지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90년대에 80년대의 사유를 고집하면서 시대를 사유하기를 게을리한 사람들은 변증법적이기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머무름으로써 변증법을 스스로 부정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80년대의 문제의식을 90년대로 이어 발전시키지 못하고 80년대와 완전히 단절되어 현실적 맥락이 없는 담론을 양산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물론 90년대에 형성된 우리 사회의 새로운 현상들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개념틀을 제시했지만, 기본적으로 80년대를 끌어안지 못하고 역사적 단절 위에서 맥락 없는 사유를 펼쳤다는 점에서 유감스러운 경향이었다. 그리고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 사유가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과 무차별적으로 혼동됨으로써 프랑스 사유의 잠재력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소화되어 들어오지 못했다는 점도 유감스럽다.

실천의 측면에서, 우리는 90년대를 ‘새로운’ 문제들의 시대로 파악하기보다는 80년대의 문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아니면 이제 문제가 끝난 시대로 양극화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지식인 집단이 전문가 집단으로 화하면서 이제 시대를 고뇌하고 저항세력을 대변하는 ‘큰 목소리’가 소멸되기 시작했다. 푸코와 들뢰즈가 ‘특화된 지식인’을 논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시대의 모순은 늘 복잡하게 연계된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과 얽혀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단지 정치나 경제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환경의 문제, 법의 문제,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오늘날의 사유는 한편으로 미시정치학적 사유를 펼치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작업들을 가로지르는 계열들을 창조함으로써 우리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는 눈빛을 계속 살려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유와 실천은 늘 총체적이어야 한다.

이정우/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 지금은 이화여대에서 강의중.

이머지새천년(http://emerge.joongang.co.kr) 19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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