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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정조와 기록 중시 시대정신 보여준 『화성성역의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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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낙성연(落成宴) 장면. ‘의궤’에는 기록을 통해 경험을 계승하고 부정과 부패를 막으려 했던 조선시대 선조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 화성 건설공사의 기획부터 완공까지의 전말을 빠짐없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는 그 가운데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다.

1776년 보위에 오른 정조는 깊은 한을 품고 있었다.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 때문이었다. 사도제사의 시신은 본래 양주군 남쪽 중량포(中梁浦) 옆 배봉산(拜峰山) 자락(오늘날 서울시립대)에 묻혀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즉위 직후 정조는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명하고 더 좋은 길지로 이장 사업을 추진한다. 이윽고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묘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기면서 주인을 기다렸다는’ 수원의 명당으로 옮겨져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린다. 비명에 죽은 지 28년 만이었다.

 정조(1752~1800)의 화성(華城) 건설은 이렇게 부친의 묘를 옮기는 사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현륭원을 조성한 뒤 정조는 수시로 수원에 거둥하여 부친을 추모했다. 1794년(정조 18년) 1월, 정조는 몸소 팔달산에 올라 수원의 지세를 직접 살피고 화성 신도시 건설사업을 시작한다. 화성을 단순히 부친을 모시는 곳이 아니라 군사적 거점이자 서울 다음가는 정치·경제적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주도면밀하게 진행된 화성 건설 사업에서는 정조의 애민(愛民)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조는 “국가의 큰 역사(役事)에는 백성이나 승군(僧軍)을 부리지 않을 수 없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일축하고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 동원한 일꾼들에게는 일일이 품삯을 지급했다. 또 건설 예정지에 들어선 민가들을 철거하지도 않았다. ‘성을 쌓는 것은 국가의 유구한 대계를 위한 것인데, 민가를 철거하는 것은 인화(人和)를 해치는 것이고, 인화가 사라지면 국가도 유구하게 이어질 수 없다’고 했다. 정조는 공사에 투입된 일꾼들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한여름 무더위에 건강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척서제(滌暑劑-더위 쫓는 약)를 하사하기도 했다.

 1796년, 역사를 끝낸 뒤에는 공사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제작했다. 공사의 기본 계획, 투입된 물자의 종류와 수량, 가격과 조달 상황, 지급된 임금 액수, 공사에 참여한 관리와 일꾼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뿐 아니라 준공된 각 건물, 공사에 사용한 도구, 그리고 주요 행사의 세밀한 모습을 목판(木版)으로 첨부했다. 최근 화성이 옛 모습대로 복원된 데는 『화성성역의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한영우, 『화성성역의궤 해제』).

 『화성성역의궤』는 정조대의 높은 문화 수준과 기록을 중시하는 시대정신을 잘 보여준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의궤류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문화재의 귀환에 기뻐만 할 것이 아니라 정조대의 ‘기록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