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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22)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밝은 눈 2

업힌 노파를 앞세우고 그들은 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땅거미가 지는 중이었다. 주차장엔 트럭 이외엔 차가 몇 대밖에 없었다. 검투사가 타는 그랜저XG가 먼저 눈에 띄었다. 세 남자와 함께 검투사도 이곳에 와 있는 모양이었다. 연못 주변은 비어 있었다. 나는 연못을 돌아 발소리를 내지 않고 전각 앞으로 올라왔다. 대웅전인 줄 알았는데 전각의 머리 위엔 ‘明眼眞閣’이라고 쓰인 현판이 달려 있었다. 명안진각이면, 밝은 눈으로 참된 것을 보는 집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절이 아닌 모양이었다. 명안진각은 문이 닫혀 있었다.

건물들은 왼쪽 비탈에 주로 배치되어 있었다.
축대를 쌓아 조성한 자리에 단층짜리 조립식 판넬로 지은 건물들이 계단식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들이 노파를 업고 들어간 것은 가장 낮은 쪽 건물이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백주사나 검투사에게 들키면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출입문은 승용차가 올라왔던 방향에 있을 터였다. 연못을 등지고 조금 내려오자 과연 문이 보였다. 자동개폐장치가 설치된 넓은 철제문은 닫혀 있었고, 사람이 드나들게 된 작은 쪽문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수위실 같은 게 있었는데 사람이 없는지 컴컴했다. 새로 일주문을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철제문 너머에 거푸집으로 둘러싸인 다른 문이 있었다. 열린 쪽문을 나와서야 비로소 철제문에 걸린 현판들이 보였다. 세 개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대한불교 명안진종 명안진사’였고, 다른 둘은 ‘사단법인 명안진 문화궁’, ‘명안진 단식원’이었다.

“이것이었어.”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투사는 ‘명안진 문화궁’과 ‘명안진 단식원’의 ‘이사장’인 모양이었다. 나는 현판 앞에서 잠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검투사는 지금 어느 건물에 있을까. 급경사를 따라 자리 잡은 세 동의 건물 위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기와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요사채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허름한 조립식 건물인 것에 비해 가장 높이 자리 잡은 그것은 누각처럼 헌칠했다. 검투사가 있을 만한 곳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창마다 어느새 불이 켜졌는데 사람의 기척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 이상야릇했다. 뭐랄까, 그곳은 세상 밖의 세상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강열한 호기심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어두워졌으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건물마다 살펴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무그늘을 좇아 명안진각 뒤쪽으로 민첩하게 올라갔다. 짓다 만 건물 골조가 그곳에 있었다. 위풍당당한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건물 앞으로 펼쳐진 너른 분지였다. 이렇게 너른 곳이 숨어 있었던가. 공터를 메운 억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수런수런, 몸 섞는 소리를 냈다. 앞이 탁 트인 곳이었다. 운악산과 세지봉 일부는 물론이고 도심으로 들어가는 터널 아가리가 막힘없이 보였다. 가히 숨은 명당이라 할 만했다. 관음동 일부까지 환히 보였다.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선 외부가 아주 잘 보이는 특별한 지형이었다.

나는 명안진각을 돌아 불 밝은 조립식 건물 쪽으로 접근했다.
몸을 숨기기 좋게 건물 뒤로 돌아갔다. 판재에 세로로 새긴 ‘명안진 단식원’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이었다. 축대와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엔 잡초들이 잔뜩 말라죽어 있었다. 축대가 키보다 커서 은신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까운 창으로 다가섰다. 실내는 장판이 깔린 너른 홀이었다. 초점을 모아야 겨우 사물을 구별해볼 수 있을 만큼 불빛은 흐릿했고, 실내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눈이 저절로 커졌다. 텅 빈 듯 고요한 그곳엔 그러나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해 누운 듯이 하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혼령 같은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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