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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삭은 시조 70여 편 … 시리고 맑고 안타까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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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중견 시조시인 김영재(62·사진)씨가 6년 만에 새 시조집 『홍어』(책만드는집)를 냈다. 2005년 『오지에서 온 손님』 이후 쓴 작품 중 70여 편을 추렸다.

 김씨는 1974년 문예지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98년 본지에서 시행하는 시조문학상인 중앙시조대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이번 시조집에 실린 작품 ‘잡기(雜器)’로 가람시조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시력(詩歷)으로나 문단의 평가로나 그의 시는 시조집 제목처럼 곰삭는 중이다.

 이번 시조집의 작품들을 반드시 음식 홍어에서 받게 되는 감각적인 느낌과 연결 지을 필요는 없겠다. 쿰쿰한 냄새나 비린내, 점액질 비슷한 종류의 끈끈함보다 뭔가 시리면서도 맑고 안타까운 이미지를 전하는 시가 많다. 대표적인 부류가 사랑시다.

 ‘도솔암 오름길에 봄눈이 휘몰아치고//선운사 절집 뒤란 동백이 붉게 피어//너 없이 살 수 없다고 봉오리 목을 꺾는다//너를 다시 만나도 꽃은 흔적 없으리//사철 푸른 동백 숲 거친 바람 맞겠지//폭설로 변한 눈보라 사랑 한 채 가두겠다’.

 시조집 2부에 실린 ‘선운사 동백은 지고’의 전문이다. (제)철 모르는 눈, 봄눈에 동백꽃 한 송이 졌나 보다. 빨간 동백꽃은 무얼 상징하는 걸까. 사랑의 붉은 마음일 게다. 세 번째 연 ‘너 없이 살 수 없다고…’는 함께 죽자는 연인들의 정사(情死)를 연상시킨다. 재미 있는 것은 ‘봄눈이 휘몰아’친 사건과 ‘동백이 붉게’ 핀 사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기보다는 별 상관 없이 나열된 사건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사랑의 치명적인 결말은 당연한 거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 자연을 목격한 시의 화자, 자신의 사랑 역시 흔적이 남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사납게 몰아치는 눈보라 사태 안에 그의 사랑은 갇힐 것이다.

 ‘눈 덮인 작은 집’도 추천하고 싶다. 사랑시는 아니지만 겨울 밤 강가 작은 집의 고즈넉한 정경이 실감 난다. 능숙하지만 꾸민듯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질박한 시편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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