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32. '문헌과 해석' 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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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문학적 유산은 얼마나 풍성할까,아니면 빈약할까.이에 답을 할라치면 먼저 박제(剝製)
상태로 놓인 우리의 전통적 학문·예술자산이 눈앞을 가로 막아 선다.설사 풍성하다고 해도 일부 전공자 말고는 그냥 '책 구경''글 구경'에 그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문헌과 해석'팀의 활동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다.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조그마한 공부방에 모여 머리를 맞대길 벌써 2년반.40여명의 소장파 국학 연구자들은 원전(原典)
을 펴놓고 번역과 주석달기 작업을 거듭하고 있다.번족번족(繁足繁族:발이 부지런하면 민족이 번성한다)
이라더니,대중적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들의 발길에서 우리의 미래를 점칠 수 있을 것 같다.

이종묵(38·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문학)
교수의 말을 옮겨와 보자."전통시대 우리 학문은 문학·사상·역사·과학은 물론 시·문인화·음악이 함께 있는 종합성격이었다.하지만 근대 이후 그것은 제각기 쪼개졌고 학자들은 다른 분야의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추세로 돌아섰다."이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근간으로 이렇게 얘기를 이어간다."내 전공은 조선 전기 시(詩)
였다.부지런히 읽고 공부했지만 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역사를 모르고 사회를 모르고 사상을 모르고 다른 예술을 모르니 시가 보일 리 만무한 것 아닌가."
이런 고민을 공유하는 우리의 문학·말·역사 전공자 10여명이 모인 것은 지난 96년 여름.당초 모태는 93년 봄부터 활동을 벌이고 있던 '두시언해'(杜詩諺解)
강독팀 이현희(42·서울대 교수·국어학)
·이호권(**·규장각 특별연구원)
·강석중(38·인제대 교수·한문학)
·이종묵 네 사람이었다.97년초 이들은 옛 문헌자료를 함께 읽고 그 의미를 탐구하자는 취지에서 공부모임의 이름을 '문헌과 해석'이라 붙이고 팀을 공식 출범시켰다.

정재영(42·한국기술교육대·국어학)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학제간 연구를 통한 인식 스펙트럼의 확대'다."연구의 방향성은 '문·사·철'(문학·역사·철학)
의 통합이었다.그런데 마침 한문학·국어학·문헌학은 물론 사상사·과학사·예술사·서지학·생활사 관련 학자들도 참여함으로써 기본 틀을 잡게 됐다."옛 시인의 유려한 글은 물론 귀족들의 재산분배 문서와 이름 모를 아낙네의 한글편지,검안(檢案)
보고서…특히 사상사 전공자들로부터 전해 듣는 지식은 문헌의 이면적 접근까지 가능하게 했다.

연구의 성과는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그러다 보니 대학원생을 주축으로 한 청강생까지 등장했는데 간혹은 그들에 의해 번역·주석의 오류가 바로 잡히기도 했다.지식의 공유 차원에서 계간지를 발간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다만 기존의 전문 학술서·저널과의 차별화 방안으로 ▶문헌자료의 소개와 번역·주석달기를 기본작업으로 삼고 ▶이론적·관념적인 주장보다는 자료실상을 중점 소개하며 ▶대학원을 졸업한 정도의 고급독자를 겨냥하되 10∼20분 동안 한편의 논문을 읽을 수 있도록 편집방향을 잡았다.

97년 9월말 '문헌과 해석'창간호가 나왔다.국학 전문 출판사인 태학사 지현구(48)
사장의 지원도 큰 보탬이 됐다.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들 연구자들이 조선을 '문헌의 나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정조(正祖)
를 장기 연구과제로 삼았다는 점이다.'정조대의 문헌'이라는 타이틀 속에 당대의 학술과 사상계의 변화를 주도했던 정조의 서적 간행의 업적을 기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주자서(朱子書)
의 실태와 그것을 선별하여 간행한 서적,그리고 정조가 직접 편찬한 책들이 집중소개했다.송시열의 학설과 주자의 학설을 조응시킨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과 주자의 편지글을 모은 '주서백선'(朱書百選)
,또 정조의 감식안으로 가려뽑은 주자의 시집 '아송'(雅誦)
등을 알기 쉽게 담아낸 것이 그 1차 성과.내년 2월엔 정조 서거 2백주년 학술대회와 책발간 사업을 통해 그 업적을 집대성할 예정이다.

조금 늦게 이 팀에 합류한 강경훈(57·성결대·한문학)
교수는 "국학의 미래'대들보'들과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나이를 뛰어넘어 들어왔다"고 고백을 한다.실제로 진준현(42·'단원 김홍도 연구'저자)
·정민(39·'마음을 비우는 지혜'저자)
·안대회(38·'7일간의 한자여행'저자)
·김문식(37·'조선후기 경학사상 연구'저자)
·사진실(34·'한국 연극사 연구'저자)
·정병설(34·'완월회맹연 연구'저자)
씨등은 이미 해당분야에서 입지를 구축한 전문가.또 남권희(43·문헌학)
·안승준(39·고문서학)
·임미선(39·한국음악학)
·황문환(38·국어학)
·김호(32·의학사)
·노영구(33·병제사)
씨등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특히 중문학 전공의 박재연(42)
·박현규(42)
교수는 각각 국내 중국문헌 조사와 중국내 한국문헌 조사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문헌과 해석'팀은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학문의 특성상 퇴계(退溪)
이황(李滉)
의 "천하의 진리가 무궁한데 어찌 자기만이 옳고 남을 그르다고 하리오"란 말을 자주 되뇐다.결코 서둘지 않는 않는 모습은 우리의 전통 인문학이 지니고 있는 완보(緩步:느린 걸음)
의 미(美)
로 설명이 가능할까.그들에게서 우리 인문학의 미래와 나라의 강건함을 읽어도 좋을 듯하다.

허의도 기자<huhe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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