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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주검 모독하는 말장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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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그저께 저녁 군에 간 둘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신자 요금 부담 전화였다. 입대 7개월 된 육군 일등병은 그동안 휴일에 전화로 안부를 전하곤 했지 평일은 이례적이었다. “잘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진돗개 하나’로 비상이 걸린 상황이니 아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군화조차 마음대로 벗기 힘든 여건일 것이다. 그런데 중대장이 부대원들에게 “각자 집으로 전화해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라”고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무척 고마웠다. “건강하고, 혹시 중대장님 뵈면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라.” 1분이 채 될까 말까, 짧은 통화였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군에 아들을 보낸 부모들은 나처럼 기껏해야 마음이 불안한 정도지만 고(故)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의 가족은 지금 절망의 나락(奈落)에 빠져 있다.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로는 위로조차 되지 않는다. 서 하사는 말년 병장이었다. 문 일병은 나의 둘째보다 4개월 늦게 올해 8월 입대한 새내기 군인이었다. 서 하사의 시신은 두 다리가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제 밤에야 나머지 신체를 피격 현장에서 찾아내 병원으로 모셨다고 한다. 문 일병은 눈을 뜬 채 숨져 있었다. 영안실에서 큰아버지가 눈을 감겨 줬다.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말로도, 무슨 돈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게다가 환갑 나이에 건설 공사장에서 일하다 참변을 당한 민간인 김치백·배복철씨와 중·경상을 입은 다른 군인들은 또 어떠한가.

 이 와중에 북한의 도발이 명명백백한 상황에서 궤변과 말장난, 균형을 가장한 양비론, 물타기, 조건 달기, 사이비 평화론을 떠드는 자들에 대해 새삼 분노를 느낀다. 그들의 논리 전개 수법은 뻔하다. 우리 탓을 많이 하고 북한 탓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북한이 권력 승계 과정에서 ‘한 건’ 벌였을 것이라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을 부각시켜 도발 책임을 덜어 준다. 피격당한 연평도 내 민간시설 일부가 과거 군시설이었다는 점을 들어 북한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었을 뿐이지 애초 민간인까지 살상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라며 ‘초점 이동’을 시도한다. 다음엔 우리 탓이다. 크게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대북 강경책이 공격을 초래했다는 거다. 작게는 호국훈련 때문에 쐈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동시에 적당히 양념도 친다. 경제가 중요하므로 강경하게 받아치면 안 된다느니, 항구적 평화체제가 중요하느니…. 마치 자기들만 경제 중요하고 평화체제 중요한 것을 아는 양 호도한다. 그게 아니라면 “남북 관계를 악화시킨 결과를 정부는 똑똑히 봐야 한다” 같은 말이 왜 나오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제 아침 어떤 신문의 사설은 ‘남북한이 어제 서해 연평도 일대에서 포격전을 벌였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미안하지만,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물타기다.

 나는 1980년대에 운동권을 풍미하던 ‘반전 반핵’ 구호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공공연해진 시점부터 부쩍 줄더니 어느 결에 ‘반전 평화’로 둔갑한 사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친북좌파의 말장난은 그냥 말장난이 아니다. 무서운 독소가 담겨 있다. 생때같은 민간인·군인들의 주검 앞에서 궤변을 일삼는 그들을 과연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제 마침 진보 진영에 오래 몸담고 있는 정성헌(64)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 전화를 걸어왔기에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긴급조치·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죄 등으로 네 차례나 투옥됐던 정 이사장이 선뜻 말했다.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도 할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이건 ‘전쟁하자’는 말과 다른 거다. 그런데 지금 진보라는 사람들은 본질을 외면하고 껍데기만 건드리고 있다. 그건 진보가 아니다. 진보로 포장된 유치함, 유아(幼兒)주의에 불과하다.” 정 이사장의 일갈에 대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 누구라도 나서서 답변을 해 주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