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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장수 재무장관이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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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지난 12일 오후 서울 코엑스 3층 회의실.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들이 모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일어섰다. 그가 G20 재무장관 회의 의장으로 사는 마지막 점심 자리였다. 그는 “내년에는 내 친구인 (의장국의) 프랑스 라가드 장관이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대접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곤 잠시 소회를 말했다.

 “지난 2년간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고통을 서로 나눴으며, 어떻게 위기에 맞서 미래로 전진했는지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나는 영원히 새기겠다.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과 협조를, 내 심장에 깊이 또 깊이. 여러분은 고국으로 담아가 달라, 우리 한국인의 마음과 약속을.”

 2분15초짜리 소회를 풀어 내며 윤 장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한다. 각국 재무장관들도 뭉클했다고 한다. 지난 2년간 윤 장관과 때론 싸우고 때론 협력하며 든 만정이 스쳐갔을 것이다. G20을 세계 경제전쟁에 비유하자면 윤 장관은 한국군 야전사령관이다. 관가와 외교가에선 “재무통인 그의 지혜와 경험, 동분서주가 없었다면 서울회의가 이처럼 매끄럽게 마무리되지 못했을 것”이란 평이 많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다. 벌써 기다렸다는 듯 개각설이 나온다. 주 타깃은 윤 장관을 포함한 경제팀이다. 신문 지상에는 수십 명의 하마평이 실리고 있다. 당장 안 바꾸면 큰일이라도 날 듯하다. 정권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교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습관적’ ‘관성적’ 교체론이다. 원래 바꾸려고 했으니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올 8월 개각 때 바꿔야 했지만 G20 때문에 미뤘다, 이제는 때가 됐다”는 게 요지다. 둘째, ‘원초적’ ‘태생적’ 불만이다. 윤 장관과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정권 창출에 기여한 바가 없다. 소위 ‘지분’이 없다는 얘기다. 심지어 두 사람은 노무현 정부 때 각각 장·차관을 맡기까지 했다. 그런 이들에게 요직을 맡기는 것 자체가 ‘끼리끼리’ 법칙에 어긋난다는 거다. 셋째, 챙겨줄 사람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2007년 대선 직전 여의도엔 ‘지금 MB에게 줄을 서면 인천 앞바다에 퐁당 빠진다’는 우스개도 돌았다. 자리는 적은데 챙겨줘야 할 사람이 많다면? 해법은 하나다. 자리의 회전율을 높이는 거다. 과거 정권들이 막판에 1년 미만짜리 장관을 ‘대량 생산’했던 전례도 있다.

 교체론이 워낙 허름하다 보니 교체 불가론도 만만찮다. 역시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재무장관은 대개 국면 전환용 또는 경제가 불안할 때 바꾼다. 그런 만큼 장수 재무장관은 튼튼한 정치·경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국은 221년간 73명의 재무장관이 평균 3년9일을 일했다. 몇몇 단명 장관을 빼면 대개 정권과 임기를 같이했다. 반면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 1989년부터 올해까지 21년간 총리는 20번, 재무상은 31번 바뀌었다. 반년에 한 번꼴이다.

 둘째, 후임도 마땅찮고 인사청문회도 부담이다. 자칫 교체의 실익은 없이 국정 혼란만 부를 수 있다. 마지막, 현 경제팀의 경험과 지혜, 인맥이 상당 기간 더 필요하다는 거다. 일례로 당장 G20 이후로 미뤘던 경제 조치들이 기다리고 있다. ▶채권 이자소득에 대한 과세 ▶선물환 거래 제한 ▶외환건전성 규제 강화 등이다. 국내 시장을 보호하는 이런 조치들은 자칫 주변국의 불만을 살 수 있다. 서울회의 땐 자유무역·자유환율을 외치더니 끝나자마자 자기 나라 이익만 챙긴다는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이를 피하려면 ‘미세한 조정(스무드 오퍼레이션)’이 필요한데 국내외 사정과 인맥을 두루 꿰고 있는 숙수(熟手)만이 그나마 가능할 일이다.

 윤 장관은 어떨까. 그의 측근은 “박수 받을 때 떠나고 싶다는 게 윤 장관의 지금 심경”이라고 귀띔했다. 감사원장으로의 영전설도 나돈다. 이래저래 장수 재무장관의 탄생은 글렀다는 관측이 많다. 윤증현 장관, 그는 과연 내년 이맘때 라가드 장관이 사는 프랑스 요리를 맛볼 수 있을까? 난망이지만, 기대해 본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