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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한겨울 구공탄, 그리고 연탄가스의 아찔한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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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52년 7월 15일의 구공탄 사용 설명회. ‘산림애호’라는 구호와 아궁이용 연탄 화로, 연탄 집게 사용법 등의 그림이 있는 벽보 앞에서 연탄 사용 시범이 진행 중이다. 오른쪽 끝에서 미군이 지켜보고 있다. 연탄 이용의 확산에는 정부의 산림애호 의지도 한몫 단단히 했다. 심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의 울창한 산림은 10여만 명의 목숨과 맞바꾼 격이다. [사진 출처 : 『사진으로 본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

우리나라에서 난방용으로 연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는데, 처음부터 ‘목탄’(숯) 대용품으로 취급됐다. 연탄은 냄새가 심하고 연기가 많이 났지만, 값은 한참 싸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1910년대에는 난형탄(卵形炭)이 개발되었고, 1920년대에는 이공탄과 삼공탄이 나왔으며, 1930년대에는 구공탄이 연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구멍이 많을수록 불이 잘 붙고 잘 꺼지지 않았기에 제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구멍 수도 늘어 해방 뒤에는 19공탄, 22공탄, 25공탄 등이 속속 출시됐다.

 1925년 1월 서울 관철동에서 행랑살이 하는 19세 처녀와 15세 사내아이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었다. 날이 너무 추운데도 아궁이에 나무를 땔 수 없어 연탄 두 개를 사서 좁은 방 화로에 피워놓고 자다가 당한 참변이었다. 일제 강점기까지 연탄은 방 안의 화로에 숯 대신 넣고 때는 ‘실내용’ 연료였다. 겨울이 되기 전에 땔나무를 쟁여 놓은 집에서는 굳이 연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사망사고는 거의가 도시의 가난한 집에서 일어났다.

 인천상륙작전 일주일 뒤인 1950년 9월 22일 서울 탈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안 임시수도 부산에서 농림부 장관 윤영선은 기자들을 불러 놓고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며 겨울철 연료 대책을 발표했다. 요지는 산림녹화를 위해 향후 신탄(薪炭) 채벌을 엄금하며, 그 대신 연탄을 공급할 터이니 집집마다 아궁이를 개량하라는 것이었다. 인명조차 돌보기 어렵던 전시에, 뜬금없이 나무를 보호하자는 얘기가 나온 이유는 알 수 없다.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치르면서 한국의 야산에 나무가 없는 데 자주 당혹감과 분노를 표했다. 엄폐물이 없는 탓에 병사들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고, 미군 3명 중 1명꼴로 정신과적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도 이유의 하나가 되었는지 혹시 모를 일이다.

 연탄 화로를 넣었다 뺐다 하며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개량’하는 사업이 전쟁 중에 시작되어 휴전 후까지 계속됐다. 이후 30여 년간, 해마다 수십만 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됐고, 그중 수천 명씩이 죽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연탄가스로 인한 사망자는 하루 열 명꼴이었다. 아궁이만 고치고 구들장은 그대로 둔 것이 화근이었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의 감소는 구들장이 사라지는 속도에 비례했다. 경기 회복의 온기를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전달하겠다고 정부가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구들장은 놓아 둔 채 아궁이만 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