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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 시시각각

환원주의의 희생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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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환원주의(還元主義)는 “다양한 현상을 기본적인 하나의 원리나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다. 환원주의는 결정론과 함께 과학의 양대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위상을 자랑한다.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는 세상사를 한 개의 원리나 요인으로 설명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자·경제·섹스·언어·기술 등 한 가지 요인으로 사회나 개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들은 사회과학의 강력한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고 있다. 복잡한 설명보다는 간단한 설명을 좋아하는 인간 습성은 과학의 세계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환원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환원주의자다. 그래서 더욱 환원주의는 극복과 경계의 대상이다.

 뭔가가 잘못됐을 때에는 당연히 잘못된 원인을 찾아내고 잘못을 고쳐야 한다. 환원주의 때문에 원인 찾기가 잘못될 수 있다. 여러 개의 원인이 아니라 딱 한 가지 원인을 찾는 것도 문제지만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만 찾는 습성도 문제다. 대표적으로 잘못된 환원주의는 ‘악마 만들기(demonization)’다.

 미국 정치세계를 들여다 보면 좌파·우파 사이에 ‘악마 만들기’가 한창이다. 지난 대선에는 모든 게 ‘부시 탓’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추락된 미국의 위신과 경제 난국이 모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잘못이라는 ‘부시 악마 만들기’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또한 ‘악마 만들기’의 타깃이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은 유권자들은 그를 ‘외국인, 이슬람 신자, 사회주의자’라고 본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악마’다. 리버럴 진영은 보수주의 유권자단체인 ‘티파티(Tea Party)’를 ‘악마’로 보고 티파티는 리버럴 진영이 ‘악마’라고 본다. 미국의 보수진영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리버럴 매카시즘(Liberal McCarthyism)’의 포로였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초 매카시즘이 정적이나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운 것처럼, 자유주의자들도 미국에 대한 생각이 그들과 다른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매카시즘이나 ‘리버럴 매카시즘’이나 생사람 잡는 데는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다.

 불행히도 미국 사회의 ‘악마 만들기’는 국내 문제에 그치지 않고 중국을 타깃으로 삼았다. 지난 2일 중간선거에는 30억 달러에 달하는 선거 광고비가 들어갔다. 29명의 후보가 상대편 후보들을 ‘친중(親中) 악마’로 몰았다. ‘모든 게 환율 때문’이라는 환원주의적 주장은 그나마 고상한 것이다.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들은 상대편에게 매국노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했다. 이러한 잘못된 환원주의는 탈산업화, 경쟁력 상실 등 미국 경제 위기의 진정한 주범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기능해야 할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파 간 갈등이 빚은 ‘악마 만들기’ 성행으로 “미국에서 내전은 이미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에게도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이나 사회단체에 모든 책임을 묻는 환원주의적 타깃 삼기의 전통이 있다. 최근 사례로는 체벌 금지 문제가 있다. 체벌 금지 때문에 교사들의 영(令)이 서지 않는다고 한다. 가깝고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체벌 금지의 충격이 영이 안 서는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는 보다 오래되고 구조적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14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에 인분을 뿌린 60대 남성 또한 어쩌면 ‘환원주의의 희생자’다. 유권자 전체, 국민 전체, 정치권 전체가 져야 할 책임을 노무현 대통령에게만 지울 수 없다.

 정권을 재창출하거나 탈환하려는 정파들에게 환원주의는 달콤한 유혹이다. 환원주의야말로 가장 나쁜 포퓰리즘이다. 환원주의의 수혜자들은 반드시 그 부메랑의 희생자가 된다. 결국에는 전체 공동체가 환원주의의 희생자가 될 위험성이 크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