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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놀러왔다 8년째 … 5억 날리는 것도 순식간이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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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4시30분 강원랜드 카지노 객장의 모습. 평일 새벽인데도 빈자리가 없다. 베팅액이 큰 게임 테이블일수록 더 붐볐다. 오전 6시에 문을 닫는 카지노는 4시간 뒤 다시 문을 연다. 신인섭 기자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정동진에 해 뜨는 거 구경 왔다가 들른 거라니까. 2003년 1월 1일이에요. 내가 강원랜드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날이.”11일 새벽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의 한 찜질방에서 만난 김모(52·여)씨는 8년째 카지노를 드나들고 있다. VIP영업장을 다녔을 정도로 ‘큰손’이었던 그는 “전 재산 다 까먹고 패가망신했다”고 말했다. 첫날 4000만원을 잃고 그걸 건지겠다고 판돈을 키웠다. 잃었다 땄다를 반복하면서 3억, 5억원씩 순식간에 날아가기 시작했다. “VIP였으면 수십억원은 잃었겠다”고 물으니 “그건 댈 것도 아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여길 온다”고 했다. “노름으로 잃은 걸 노름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도 알고, 미련 없이 떠나야 하는 것도 안다”면서 말이다. “따 봤던 경험이 있어 계속하게 된다”는 것도, “(서울에서) ‘사모님’ 소리 듣다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니 여기가 마음 편하다”는 것도 그가 정선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2000년 10월 28일 폐광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강원랜드 카지노가 문을 열었다.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는 얼마 전 개장 10년을 맞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지역의 희망이었던 카지노는 그러나 10년 새 도박 중독자를 양산하며 사회 문제를 만들어냈다. 강원랜드가 있는 사북읍과 그 옆의 고한읍에는 가산을 탕진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떠돌고 있다. 이들은 속칭 '생활 도박인'혹은 ‘카지노 앵벌이’로 불린다. 아예 이곳에 눌러앉아 모텔이나 찜질방을 전전하며 카지노를 드나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지에서 도박중독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희망센터 임인자 사무국장은 “카지노 노숙자가 고한·사북읍에만 1000명은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0~3000명은 된다”는 것이 현지에서 만난 ‘카지노 앵벌이’들의 말이다. 중앙SUNDAY가 10~11일 강원랜드 카지노가 있는 정선군 사북·고한읍을 찾았다.

21:30 pm 카지노 객장

공항처럼 보안 검색을 마치고 입장한 카지노는 슬롯머신 돌아가는 기계음으로 번잡했다. 평일 저녁인데도 슬롯머신은 물론 테이블까지 객장 안에 빈자리는 없었다.블랙잭(카드의 합이 21, 또는 21을 넘지 않으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열리는 테이블.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 9명이 앉았다. 모두가 10만원짜리 노란색 칩 3개씩 걸었다. 1회에 가능한 최대 베팅액이다. 그 뒤를 겹겹이 둘러싸고 선 사람이 10여 명. 이들도 30만원씩 걸었다. 한 게임이 돌고 승패가 갈리는 데 걸리는 40여 초 사이 수십 개의 칩, 수백만원이 왔다갔다 한다. 딜러가 패를 돌리는 사이, 모두의 표정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굳어 있다. '달그락달그락’ 칩을 만지작거리는 소리뿐이다. 승부가 나는 순간에야 “아~' 하는 탄식과 “그렇지!” 하는 탄성이 오간다.

1.강원랜드 진입로엔 100곳이 넘는 전당사가 영업 중이다. 마을 곳곳엔 전당사에 담보로 맡겨진 승용차들이 줄지어 주차돼 있다. 2.고한읍 한 찜질방. 자정을 넘기면서 ‘카지노 앵벌이’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누웠다. 3.11일 오전 10시. 카지노가 개장하자 사람들이 당첨번호에 따라 줄지어 입장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바카라(두 장의 카드를 더한 수의 끝자리가 9에 가까운 쪽이 이기는 게임) 게임 테이블. 딜러 앞에 노란 고무줄로 둘둘 만 5만원권 뭉치를 들고 40대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그중 일부가 딜러에게 건네졌고 노란 칩 30개가 그에게 돌아갔다. 그가 남은 돈 뭉치를 또 딜러에게 건네는 데는 10분이 채 안 걸렸다. 객장의 직원에게 게임룰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더니 “모르는 게 좋아요.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한다니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01:30 am 고한읍 찜질방

강원랜드에서 자동차로 5분여 거리인 한 찜질방. ‘카지노 앵벌이’들이 숙박을 해결하는 곳이다. 흡연실에 40, 50대 남성 셋이 모여 있었다. “오늘은 다 죽었어.” 방금 객장에서 돌아왔다는 40대 남성이 말했다. ‘죽었다’는 건 ‘잃었다’는 말. 오늘 들고 간 돈을 다 잃고 돌아왔다는 얘기다. 그 옆에 있던 이모(50)씨는 충주에 가족을 두고 정선에서 지낸 지 5년이 됐다. 그는 카지노가 생기기 전인 1998년 이곳에서 ‘하우스(사설도박장)’를 6개월 정도 운영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딱 제어한다니까. 번 돈으로만 하면 돼”라면서 “난 여기서 생활 바카라를 한다고 했다. 카지노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의 생계 수단은 ‘대리베팅’이다. 1회 베팅 한도인 30만원이 성에 차지 않는 이들이 ‘병정’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뒤에서 자신이 거는 대로 똑같이 베팅하도록 하는 것이다. ‘병정’은 일당을 받거나 딴 돈의 5% 정도를 수고비로 받는다. 이씨는 이 돈으로 생활비를 대고 자기 도박도 한다. “그래서 얼마를 버느냐”는 질문에 “600~700(만원) 벌면 여기서 거지생활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끝내 정확한 액수를 말하지 않았지만 과장이 섞인 듯했다. 임 국장도 “도박하는 사람들의 셈법은 우리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보통 사람은 ‘10만원 들고 와서 1만원 남으면 9만원 잃었다’고 하지만 중독자들은 거쳐간 돈을 전부 셈한다”는 것이다.

이씨 같은 ‘카지노 앵벌이’들이 생계를 꾸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최근엔 단속이 심해졌지만 배정받은 좌석을 자릿세 받고 팔기도 하고 강원랜드 앞 100여 곳이 넘는 전당사에서 돈 심부름도 한다. 찜질방에서 만난 박모(52)씨는 자리를 팔다 걸려 내년 3월까지 출입정지를 당했다. 이 외에도 식당이나 모텔 등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인력시장에도 나간다.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 허가 근거가 된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2015년 만료되면서 사업다각화를 위한 종합리조트 건설현장이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번 돈은 다시 카지노로 들어간다.임 국장은 “해외 카지노로 손님을 안내하는 등 카지노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많다”면서 “눈 밝히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칩만 주워도 먹고 산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게임에 집중한 사람들은 떨어진 칩을 주울 새가 없으니 그것만 챙겨도 수입이 된다는 거다.

전 재산을 날리고 ‘앵벌이’로 번 돈을 또 카지노에 갖다 바치는 이들은 “죽을 생각을 늘 한다”고 말한다. 정선경찰서에 따르면 카지노 개장 이후 정선에서 도박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40여 명, 올해만 6명이다. 하지만 이는 유서가 있거나 카지노 출입기록, 채무관계 등을 정확히 따져 공식 집계한 수치일 뿐이다. 임 국장은 “올해 6월에만 3명이 자살했고 1년에 30명은 자살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4:00 am 카지노 객장

다시 찾은 카지노 객장은 저녁 때와 차이가 없었다. 소액을 베팅할 수 있는(최소 1000원, 최대 10만원) 게임 테이블에서 하나둘 사람이 빠지기 시작했을 뿐, 베팅액이 큰(최소 1만원, 최대 30만원) 테이블은 여전히 붐볐다. 폐장을 20분 앞두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금일 영업시간은 6시까지입니다.” 오전 10시에 다시 열 때까지 4시간을 쉰다. 안내방송에도 자리를 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블랙잭이 한창이 한 테이블엔 자리에 앉은 7명이 모두 여성이었다. 3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이처럼 최근 강원랜드엔 여성이 부쩍 늘었다. 40~50대 주부가 많다. 임 국장은 “남녀 비율이 최소 7대 3이다. 남성의 경우 가족이 빚도 갚아주고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지만, 여성은 버림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20대도 늘었다. 찜질방에서 만난 김씨는 “2006년 스키장이 생기면서부터”라고 했다. 스키장에 놀러왔다가 재미 삼아 카지노 출입을 시작하는 젊은이가 많다는 거다. 그는 “젊은 애들이 도박에 빠지는 건 정말 큰일이다. 내 인생도 망했지만 그래도 난 어느 정도 이뤘다 무너지지 않았느냐. 아직 이룬 것도 없는 애들이 무너지면 바로 인생 종 치는 것”이라고 했다.

6시가 다 돼서야 사람들이 줄지어 카지노를 빠져나갔고 이들은 기계 앞에 다시 줄을 섰다. ‘콤프카드’를 조회하는 기계다. 콤프카드는 일종의 마일리지 카드로 게임 시간과 베팅액에 따라 ‘콤프’가 적립된다. 호텔 내에서는 물론 호텔 밖 식당·수퍼마켓·미용실·숙박업소 등에서도 결제수단으로 쓸 수 있다. 현금처럼 사용하는 ‘콤프’ 역시 ‘카지노 앵벌이’들의 주요 생활 수단이다. 직접 식비 등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콤프 카드 거래’ ‘콤프 깡’이 성행한다.
긴 하루를 마친 사람들을 카지노 밖에서 맞는 건 호객꾼들이다. 인근 찜질방에서 승합차를 보내 ‘앵벌이’들을 실어나른다. 호객꾼들의 외침이 차가운 새벽공기를 갈랐다. “숙박 필요하신 분.”

09:30 am 카지노 로비

이튿날 개장시간을 30분 앞둔 카지노 로비는 벌써 인산인해다. 하루 전 전화자동응답시스템(ARS)으로 예약해 당첨 받은 번호대로 입장하는데도 개장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10시. ‘딩동’ 하는 벨소리와 함께 벽에 걸린 대형 화면에 ‘1~20번’이라고 자막이 떴다. 입장권을 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자리 맡으려면 (베팅액이) 30(만)단위면 600번대, 10단위는 1000번대면 충분해요.” 옆에선 30대 여성이 설명해 줬다. 베팅액이 큰 테이블일수록 경쟁이 치열하다는 얘기다. 옆에 선 중년 남성은 앞 번호를 받지 못한 듯 초조해했다. 2340번까지 입장하는 데 걸린 시간은 45분. 당첨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입장했다.

카지노 바로 아래엔 ‘석탄역사보존현장’이 있다.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자리다. 카지노는 동원탄좌의 사택 자리였다. 번지점프대처럼 높이 서 있는 갱도 입구 뒤로 강원랜드의 삐죽 솟은 지붕이 보인다. 그 옛날 '막장'으로 불리던 자리에 우뚝 선 카지노는 또 다른 막장 인생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선=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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