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⑧ 외세 의존의 한계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재위 31년(1894) 정월 고종은 낮잠을 자다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고선 뒤숭숭했다. 고종은 그해에 동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일본이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천진조약에 따라 청국이 파병하면 일본도 파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5월 6일 청나라는 주청 일본 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에게 “조선에 내란(동학)이 있어 병사를 파병하는데 조약에 따라 통지한다”고 통보했다. 그날 오후 3시 일본군은 이미 인천항에 도착했다.
청·일 양국이 이 땅에서 결전할 가능성이 농후해진 상황에서도 고종은 밤마다 전등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놀게 했다. 대신 민영주(閔泳柱)가 이 행사를 전담했다.
청일전쟁의 승전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국회를 장악할 수 있었고, 메이지 일왕은 ‘신성한 천황’으로 격상되었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국민의 군대로 격상했다. 1895년 4월 17일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李鴻章)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의 핵심은 요동(遼東)반도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이었지만, 제1조는 “조선국의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승인할 것”이었다.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일본은 조선 내정의 폐단 때문에 동학 같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라면서 고종 31년(1894) 6월 25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에게 군국기무처를 구성해 내정개혁에 나서게 했다. 김홍집 내각이 수행한 개혁정책이 갑오경장(甲午更張) 또는 갑오개혁이다. 황현은
군국기무처는 ▶개국 연호 사용 ▶문벌과 양반·상민의 계급 타파 ▶연좌제 폐지 ▶공사(公私) 노비제도 폐지 등의 대개혁을 단행했다. 김홍집 내각은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았는데 대원군의 성향은 이런 근대적 개혁과 맞지 않았다. 김홍집 내각은 ‘대원군의 교자(轎子)를 8명이 메게 하고, 순검(巡檢)이 호위한다’는 등의 의절(儀節)을 마련했다. 그런데 그해 10월 함경도 출신의 개화파 법무협판 김학우(金鶴羽)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뒤늦게 잡힌 범인 전동석(田東錫)이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의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원군 연루설이 파다하게 퍼졌으나 진상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이 평양관찰사 민병석(閔丙奭)에게 ‘청국에 대군을 보내 일본군을 축출하고 친일 세력을 숙청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밀서가 발각되면서 대원군은 물러나야 했다. 청나라에 납치되고도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원군의 한계였다.
고종은 일본의 지지를 받는 박영효가 귀국하자 갑신정변 직후 ‘오적(五賊)’으로 규정했던 사실도 잊은 듯 내무대신으로 삼아 개혁을 주도하게 했다.
그 직후 민씨 척족 계열의 심상훈(沈相薰)이 ‘박영효가 왕비를 살해하고 정부를 뒤엎을 음모를 꾀하고 있다’고 상주했고,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고종 부부는 친러파로 돌변했다. 17년 전 수신사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의
명성왕후를 잃은 고종은 큰 슬픔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곧 전 상궁 엄씨를 입궁시키는데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에 의해 사실상 유폐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0월 12일 친위 1대대 남만리(南萬里) 등 800여 명의 군인이 고종을 대궐 밖으로 대동하고 나와 정권을 장악하려다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魚允中)에 의해 격퇴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 공사 및 러시아 공사도 이번 사건을 묵인 혹은 교사한 혐의가 있다(‘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No. 466)”고 분석하면서 ‘국왕 탈취사건’이라고 불렀다. 고종은 각 열강과 각 정파 사이의 탈취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면서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11월 15일 새벽 일본에 위협을 당한 고종은 “짐이 신민에 앞서 머리를 먼저 깎겠다”고 길게 탄식하면서 정병하(鄭秉夏)에게 머리를 깎게 하고 유길준에게 세자의 머리를 깎게 했다. 황현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곡성(哭聲)이 하늘을 진동하고 사람마다 기절하여 형세가 당장 변이 생길 것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반발하는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선 가운데 고종은 벼르던 김홍집 내각에 역전 승부수를 던졌다. 재위 33년(1896) 2월 11일 새벽 세자, 후궁 엄씨 등과 함께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것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경무관 안환(安桓)을 불러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령(捕殺令)을 내렸다. 사람들이 도주를 권하자 김홍집은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처럼 역적이란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죽음의 길로 나갔다. 조병하와 어윤중 등도 군중에게 살해되었고 유길준·장박·조의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근대국가 수립을 꾀했던 갑오개혁은 고종에 의해 좌절되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한 데 이어 온건 개화파도 제거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황현이 ‘헌정(憲政)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고종은 조선이 헌정국가로 가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삼국간섭에 이어 아관파천까지 당한 일본은 전쟁으로 러시아를 격퇴하고 조선을 차지하기로 결의했다.
자국 주재 외국 공사관으로 망명한 상태에서도 고종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제국가를 꿈꾸고 있었지만 이미 근대국가 체제에 들어간 일본은 그런 고종의 제국을 먹이로 삼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