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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왕권 집착한 고종, 나라를 열강의 먹이로 내놓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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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28면

청일전쟁의 참화 청일전쟁이 벌어진 평양 선교리의 모습이다. 고종이 청국군의 파병을 요청한 뒤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사진가 권태균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⑧ 외세 의존의 한계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김홍집의 젊은 시절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은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려다 고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재위 31년(1894) 정월 고종은 낮잠을 자다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고선 뒤숭숭했다. 고종은 그해에 동학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일본이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천진조약에 따라 청국이 파병하면 일본도 파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5월 6일 청나라는 주청 일본 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에게 “조선에 내란(동학)이 있어 병사를 파병하는데 조약에 따라 통지한다”고 통보했다. 그날 오후 3시 일본군은 이미 인천항에 도착했다.

청·일 양국이 이 땅에서 결전할 가능성이 농후해진 상황에서도 고종은 밤마다 전등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놀게 했다. 대신 민영주(閔泳柱)가 이 행사를 전담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6월 21일 일본군을 이끌고 대궐을 침범한 후에야 이 놀음이 중지됐다고 전한다. 이틀 후인 6월 23일 일본 전함 요시노(吉野)는 아산만 서북쪽 풍도(豊島) 부근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의 제원(濟遠)함 등을 선제 공격했다. 청일전쟁에 대해 러시아 외교관 제노네 볼피첼리는 “일본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쳐 환호했으며 조국의 영광된 승리를 위해 스스로 커다란 희생을 감내할 준비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반면 “중국인들은 조선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제노네 볼피첼리, 구한말 러시아 외교관의 눈으로 본 청일전쟁)”고 전해진다.

청일전쟁의 승전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국회를 장악할 수 있었고, 메이지 일왕은 ‘신성한 천황’으로 격상되었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국민의 군대로 격상했다. 1895년 4월 17일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李鴻章)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의 핵심은 요동(遼東)반도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이었지만, 제1조는 “조선국의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승인할 것”이었다.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일본은 조선 내정의 폐단 때문에 동학 같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라면서 고종 31년(1894) 6월 25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에게 군국기무처를 구성해 내정개혁에 나서게 했다. 김홍집 내각이 수행한 개혁정책이 갑오경장(甲午更張) 또는 갑오개혁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일본이 조선에 ▶문벌 타파 ▶정권의 정부 이양 ▶학교 설립 등의 내용을 담은 ‘5강(綱) 16조(條)’를 보내 시행하라고 권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이 조약들이 반드시 우리를 진정으로 위한 것도 아니지만 병에 쓰는 약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평가했다. 기회도 되고 위기도 될 수 있었던 갑오개혁의 이중성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같은 책에서 황현은 “개정된 신법이 반포되자 백성들은 모두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기뻐하면서, 서양법을 따르든 일본법을 따르든 다시 태어난 것처럼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구(舊)러시아 공사관 망루 고종은 갑오개혁으로 조선이 헌정 국가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다. 서울 정동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군국기무처는 ▶개국 연호 사용 ▶문벌과 양반·상민의 계급 타파 ▶연좌제 폐지 ▶공사(公私) 노비제도 폐지 등의 대개혁을 단행했다. 김홍집 내각은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았는데 대원군의 성향은 이런 근대적 개혁과 맞지 않았다. 김홍집 내각은 ‘대원군의 교자(轎子)를 8명이 메게 하고, 순검(巡檢)이 호위한다’는 등의 의절(儀節)을 마련했다. 그런데 그해 10월 함경도 출신의 개화파 법무협판 김학우(金鶴羽)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뒤늦게 잡힌 범인 전동석(田東錫)이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의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원군 연루설이 파다하게 퍼졌으나 진상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이 평양관찰사 민병석(閔丙奭)에게 ‘청국에 대군을 보내 일본군을 축출하고 친일 세력을 숙청해 달라고 요청하라’는 밀서가 발각되면서 대원군은 물러나야 했다. 청나라에 납치되고도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원군의 한계였다.

고종은 일본의 지지를 받는 박영효가 귀국하자 갑신정변 직후 ‘오적(五賊)’으로 규정했던 사실도 잊은 듯 내무대신으로 삼아 개혁을 주도하게 했다. 매천야록은 “이때 관직의 파직과 승직은 모두 박영효가 주관하므로 벼슬을 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은 박영효를 만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고 전하는데, 심지어 고종은 박영효에게 첩까지 얻어주었다. 이때 상황 변화가 발생했다.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요동반도 반환을 요구해 관철시킨 삼국간섭(三國干涉)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러시아에 기대는 한편 김홍집·박영효 내각의 개혁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그해 윤5월 3일 궁성 호위병 교체 문제 때 대신들이 “폐하께서 이미 재가하신 것”이라고 말하자 고종은 “작년(1894) 6월 이래로 칙령이나 재가 사항은 모두 짐(朕)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고종은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이 근대국가로 가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헌정 체제가 수립되면 왕권이 제약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직후 민씨 척족 계열의 심상훈(沈相薰)이 ‘박영효가 왕비를 살해하고 정부를 뒤엎을 음모를 꾀하고 있다’고 상주했고,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고종 부부는 친러파로 돌변했다. 17년 전 수신사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갖고 들어와 ‘러시아 세력을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당시 고종이 그에 동조해 큰 논란이 일어났던 데 비하면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청일전쟁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고종 부부가 러시아로 기울면서 일본의 입지가 약해지자 육군 중장 출신의 신임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극단의 무리수를 구상했다. 고종 32년(1895) 8월 20일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해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사건 가담자인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는 “궁중의 중심 인물인 민후(閔后)를 제거해 러시아로 하여금 그 결탁할 당사자를 잃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양책(良策)이 없다(小早川秀雄, 閔后<6B82>落事件)”고 말했다. 조선이 친러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만행이란 뜻이다.

명성왕후를 잃은 고종은 큰 슬픔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곧 전 상궁 엄씨를 입궁시키는데 매천야록은 “민후(閔后)의 시해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째 되는 날이었는데, 임금이 이처럼 중심이 없었으므로 도성 사람들은 모두 한탄했다”고 전하고 있다. 남가몽은 고종이 부른 것이 아니라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엄씨가 스스로 궁중에 나타난 것이라고 조금 달리 전하고 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에 의해 사실상 유폐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춘생문(春生門)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0월 12일 친위 1대대 남만리(南萬里) 등 800여 명의 군인이 고종을 대궐 밖으로 대동하고 나와 정권을 장악하려다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군부대신 서리 어윤중(魚允中)에 의해 격퇴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 공사 및 러시아 공사도 이번 사건을 묵인 혹은 교사한 혐의가 있다(‘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No. 466)”고 분석하면서 ‘국왕 탈취사건’이라고 불렀다. 고종은 각 열강과 각 정파 사이의 탈취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면서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11월 15일 새벽 일본에 위협을 당한 고종은 “짐이 신민에 앞서 머리를 먼저 깎겠다”고 길게 탄식하면서 정병하(鄭秉夏)에게 머리를 깎게 하고 유길준에게 세자의 머리를 깎게 했다. 황현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곡성(哭聲)이 하늘을 진동하고 사람마다 기절하여 형세가 당장 변이 생길 것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반발하는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선 가운데 고종은 벼르던 김홍집 내각에 역전 승부수를 던졌다. 재위 33년(1896) 2월 11일 새벽 세자, 후궁 엄씨 등과 함께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것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경무관 안환(安桓)을 불러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령(捕殺令)을 내렸다. 사람들이 도주를 권하자 김홍집은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처럼 역적이란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죽음의 길로 나갔다. 조병하와 어윤중 등도 군중에게 살해되었고 유길준·장박·조의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근대국가 수립을 꾀했던 갑오개혁은 고종에 의해 좌절되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제거한 데 이어 온건 개화파도 제거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황현이 ‘헌정(憲政)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고종은 조선이 헌정국가로 가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삼국간섭에 이어 아관파천까지 당한 일본은 전쟁으로 러시아를 격퇴하고 조선을 차지하기로 결의했다.

자국 주재 외국 공사관으로 망명한 상태에서도 고종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제국가를 꿈꾸고 있었지만 이미 근대국가 체제에 들어간 일본은 그런 고종의 제국을 먹이로 삼을 정도로 성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