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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MT, 통기타, 모닥불, 첫 사랑 … 아련한 젊은 날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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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인 화랑대역.

서울 청량리역에서 경춘선 열차는 하루에 19번 출발한다. 종점인 남춘천역까지 얼추 2시간 걸린다. 서울에서 400㎞ 거리인 부산도 고속열차 덕분에 2시간 남짓 걸리는 요즘, 100㎞도 채 안 되는 춘천을 2시간 가까이 소비하는 건 어쩌면 낭비일지 모른다. 하나 이번 가을부터 경춘선은 거의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마침 단풍 시즌이 맞아 떨어진 덕도 있겠지만,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경춘선 없어지기 전에 꼭 타봐야겠다며 찾아온 중년 손님, 사진으로 간직하겠다며 촬영장비 짊어지고 나타난 학생 손님이 부쩍 늘었단다.

기차여행은 추억을 남긴다. 강촌역 기둥에 남긴 낙서는, 고스란히 우리네 청춘의 흔적이다. 다시 돌아봐도 그 시절이 그립다.

늘 곁에 있던 친구도 안 보이면 보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물며 우리네 스무 살 추억 어린 그 열차가 사라지는데…. 춘천 가는 기차 하면 생각나는 몇 곳을 소개한다. 열차에서 문득 내리고 싶은 곳이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경춘선 복선 전철 얘기가 나오면 가장 먼저 돌아오는 질문이 있다. 기차역은 어떻게 돼요? 정답은 “역마다 달라요”다. 원래 경춘선엔 모두 20개 기차역이 있었고, 지금은 17개 역이 운영되고 있다. 이 중에서 9개 역이 살아남았다. 철거되지 않았다고 해서 기차역으로 남는 건 아니다. 살아남은 역은, 기차역의 수명을 다하고 새로운 삶을 산다.

(위) 강촌역으로 막 들어오는 경춘선 열차. 기차여행 마니아가 좋아하는 장면이다. (아래) 엄마와 아이가 손 맞잡고 기차여행을 나왔다. 화랑대역에서.

살생부 명단에서 남은 경춘선 기차역은 다음과 같다. 화랑대·사릉·금곡·가평·경강·백양리·강촌·김유정·남춘천역. 이 중에서 화랑대·사릉·금곡역 일대는 서울시에서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고, 나머지 기차역도 경기도와 강원도가 관광명소로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살아남은 역 중에서 꼭 가볼 곳이 있다. 우선 화랑대역. 서울에 남은 마지막 간이역이자 등록문화재다. 화랑대역이 특별한 건 권재희 역장(55)의 애정이 남달라서다. ‘화랑대마지막역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파고 다니는 권 역장은 역 안에서 그림 전시회도 열고 연주회도 한다. 역 구내에 걸어놓은 ‘우리 역에서 기차를 타볼 수 있는 날 ○○일’이란 문구가 눈에 밟힌다. 소감을 묻자 권 역장은 “소설 ‘마지막 잎새’ 아시죠? 딱 그 심정입니다”고 대답했다. 옛날 시골역의 훈훈한 공기가 역사(驛舍)를 감돌고 있다.

강촌역도 빠뜨릴 수 없다. 얼추 20년 만에 들어가 봤는데, 역 구내의 터널 기둥에 적힌 온갖 낙서를 보고 요즘도 강촌이 대학생 MT 명소란 걸 알 수 있었다. 강촌역은 피암터널 안에 들어서 있어 독특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기차여행 동호회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기차여행 명소다.

5 경춘선 유일의 무인역인 백양리역. 6 경춘선을 대표하는 간이역인 경강역 모습. 7
김유정역에서 500m 걸어나오면 김유정문학촌이 있다.

김유정역은 역 자체보다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인명(人名)역이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기차역 앞마을이 소설가 김유정(1908∼37)의 고향인 실레마을이다. 김유정은 제 고향에서 ‘동백’ ‘봄·봄’ 등 작품 대부분을 썼고, 그 작품 대부분이 실레마을에 있었던 일화를 소재로 삼았다. 역에서 500m쯤 걸어 들어가면 김유정문학촌이 나온다. 김유정 생가도 말끔히 복원돼 있고, 김유정 소설에 등장했던 장소마다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김유정문학촌(www.kimyoujeong.org)에서 탐방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033-261-4650.

경춘선 간이역 중에선 경강역과 백양리역이 예쁘다. 기차역 ‘경강’은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한 글자씩 앞 글자를 따와 지었다. 영화 ‘편지’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역 구내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포근한 기분이다. 참, 경강역 화장실은 기차여행 동호회 사이에서 명소로 통한다. 유일한 재래식 변소다.

백양리역은 경춘선 유일의 무인 열차역이다. 승객은 타고 내리지만 역무원은 근무하지 않는다. 철길 위에 외로이 서 있는 역사가 왠지 안쓰럽다. 춘천행 열차는 하루 세 번, 청량리행 열차는 하루 네 번 백양리역에서 멈춘다.

 끝으로 경춘선 열차 시간표를 알린다. 청량리역에서 춘천행 첫 차는 오전 6시15분 출발한다. 이후 오후 8시까지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출발한다. 남춘천역에서 출발하는 청량리행 막차 시간은 오후 9시10분이다. 모든 경춘선 열차가 모든 경춘선 기차역에 서는 건 아니다. 이를 테면 화랑대역에서 춘천행 열차는 하루 세 번만 출발한다. 

조금은 지쳐있었나봐 쫓기는 듯한 내생활 /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보며 /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 / 지난 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춘천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 오월의 내사랑이 숨쉬는곳 / 지금은 눈이내린 끝없는 철길위에 / 초라한 내모습만 이길을 따라가네 / 그리운 사람

차창가득 뽀얗게 서린 입김을 닦아내 보니 / 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한잔 마시고 싶어 / 저녁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

춘천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 오월의 내사랑이 숨쉬는곳 / 지금은 눈이내린 끝없는 철길위에 / 초라한 내모습만 이길을 따라가네 / 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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