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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일본인에게 ‘뇌물’로 넘어간 숱한 문화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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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간송 전형필(1906~62)은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재의 반출을 막기 위해 전 재산을 기울여 가며 발버둥친 문화재 수호 역사의 ‘영웅’이다. 그러나 그와 경매장에서 맞선 상대는 거의 일본인이었으며, 그나마 매번 이긴 것도 아니다. 더구나 정말 힘 있는 일본인들은 굳이 경매장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들에게는 조선 귀족과 부호들이 알아서 구해다 바쳤다.

강제병합 넉 달 뒤인 1910년 12월, 이회영 6형제와 일가족 60여 명이 남부여대하고 서울을 떠나 만주로 향했다. 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일원으로서, 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나선 길이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전 재산을 처분했다. 가옥과 전답은 물론 집안 대대로 전해 온 골동과 서화도 내다 팔거나 버렸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먼 길을 떠나는 마당에 행로에 번거로움만 끼칠 무거운 짐,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 들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무렵 서울을 떠난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러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서울 양반들의 생계 수단은 본래 ‘벼슬’이었는데, 나라가 망했으니 벼슬자리인들 남아날 턱이 없었다. 고등관은 물론 중간 관리들조차 전부 일본인 차지가 되었으니, 서울에 남아 있어 봐야 앞날이 막막했다. 더 늦기 전에 얼마 안 되는 가산이라도 처분해 연고가 있는 시골에 농토를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1910년 이후 몇 년 동안 서울의 일본인 인구는 급증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조선인 인구가 줄어들었다. 서울 북촌 양반 동네에서는 하루에도 몇 집씩 이삿짐을 쌌고, 그때마다 후일 문화재로 평가될 만한 물건들이 버려지거나 헐값에 장사꾼 손에 넘어갔다.

 북촌에서 종로 큰길로 이어지는 옛 충훈부 옆 길, 지금의 인사동에는 이들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가 하나 둘씩 생겨났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관리들, 회사원들, 교수들은 기념품 삼아 그런 물건들을 사 모았으며, 그러면서 조선 문화재에 대한 안목도 키웠다.

 1931년 봄, 이완용의 생질 한상룡은 조선 재계에 영향력이 있는 일본 고위층들을 만나기 위해 도쿄 여행길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새로 설립될 조선신탁주식회사 사장 자리를 얻기 위한 것이어서 선물에 더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한성은행 총무 시절에도 늘 그랬듯, 값나가는 조선 골동과 서화들을 ‘선물용’으로 단단히 포장해 관부 연락선에 실었다. 다른 조선 귀족들과 친일 관료들, 기업인들도 도쿄에 ‘로비’차 갈 때마다 조선 ‘문화재’들을 싸들고 갔다.

 일본 민간인들이 자진해서 우리 문화재를 반환하는 사례가 하나 둘 나오고 있으니 일단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일본으로 문화재가 반출된 경로는 너무 다양했고, 일본인들이 함부로 반출해 간 것보다 조선인들이 뇌물로 갖다 바친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해외에서 떠도는 우리 문화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까지고 국망(國亡)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킬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