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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강경 포구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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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한강 풀숲에서 잠자리 한 쌍이 짝짓기를 하고 있다. 수컷은 기도라도 하듯 경건하다. 두 발로 암컷의 꽁무니를 소중히 받쳐 들고 자신의 온 몸을 휜 자세로 숨죽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짝짓기를 끝낸 잠자리 한 쌍은 한 몸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오래 오래 날며 잠자리의 대를 이어갈 생명의 씨를 뿌린다. 억새는 축하라도 하듯 하얗게 흔들거리고 못 생긴 갈대도 머리를 흔들어 대고 검보랏빛 수크령과 엉겅퀴들은 몸을 비벼댄다. 가냘픈 생명을 이어가는 저 작은 것들의 몸짓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강화도 선두리에서 해가 진다. 둑을 따라 걸으니 바닷가에서 놀던 큰 기러기들이 슬금슬금 달아난다. 아무래도 이 놈들 중에도 리더가 있나 보다. 누군가 신호를 보냈는지 작은 동산만한 갈대밭 속에서도 큰 기러기 떼가 꾸역꾸역 기어 나와 저 쪽으로 달아난다. 물 위에 깔린 옅은 안개 속으로 거북선처럼 생긴 것들이 수백 척의 함대처럼 무리 지어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름 내내 이 동네는 의젓한 백로들의 터전이었는데 이젠 백로들은 보이지 않고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오리떼가 사방을 점령했다. 한강 모래톱과 곡식을 거둔 들녘, 그리고 이런 바닷가까지 온통 큰기러기, 쇠기러기, 청둥오리들 세상이다.

 손님이 없어 주인도 잠시 자리를 비운 찻집에 루이 암스트롱과 빌리 홀리데이가 부르는 ‘서머 타임’이 자장가처럼 느릿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서머 타임이라. 섬진강가에 복사꽃이 핀 게 엊그제인데 벌써 은행 잎이 지고 있다. 들녘은 쓸쓸히 물들고 땅에 떨어진 마른 나뭇잎들은 바람에 서걱거린다. 흐르는 강물, 흐르는 시간, 흐르는 음악은 똑같다. 가슴을 흔든다.

 강경 포구 억새밭에서도 해가 진다. 찰랑거리며 흐르는 금강 줄기에 지는 해의 붉은 기운이 낮게 비치면 그 기운에 한껏 고무된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 위로 펄쩍 뛰어오른다. 키를 넘는 억새 밭 속에선 참새 반도 안 되는 철 없는 오목눈이들이 분주히 날고 어둑한 하늘에선 큰기러기 떼가 무리 지어 날아간다. 곡선으로 휘어진 머리와 긴 목이 검은 색 판화처럼 하늘을 수놓는다. 멋지고 잘생긴 저 놈들은 왜 이 시간만 되면 온통 날아오르는 것일까.

 오리들의 비상이 아름답다. 가을이 아름답다. 이 가을에 결혼하는 청춘 남녀들도 아름답다. 천재기사 이창호 9단이 서른 다섯 살에 결혼했는데 수줍음 많은 이창호는 주례도 하객도 없이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살그머니 식을 올렸다. 신부가 된 도윤씨도, 그리고 창호씨의 수줍음도 아름답게 느껴져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가끔 바둑TV에 함께 출연하는 김효정 2단도 늠름한 경찰 공무원과 짝을 맺었다. 이 가을에 결혼하는 청춘들과 함께 창호씨, 효정씨 부부도 행복하길 빈다.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잠자리 한 쌍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고 숭고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저 아득한 대멸종시대에도 살아남아 싹을 틔운 뒤 억만 년의 고난과 역경을 거쳐 생명으로 탄생한 모든 것들 중에서도 사람은 가장 아름답다. 아름다운 가을에 강경 포구에 앉아 지는 해의 아름다움에 도취한다. 아름다운 것들에 경배한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