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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키워드로 풀어본 미국 ‘양적 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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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3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거래소의 한 중개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주문을 내고 있다. 이날 연준은 미국 경제의 회복 속도가 더디다는 이유로 목표 금리를 0~0.25%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시카고 로이터=연합뉴스]

“이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 의장)

“득보다 실이 클 위험이 있다.”(토머스 호니그 캔자스시티 연준 총재)

2차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가 몰고 올 효과에 대해선 미국 연준 내에서도 진단이 확 갈린다. 하지만 결국 12명의 공개시장위원회(FOMC) 멤버 중 호니그 총재를 제외한 11명은 찬성 표를 던졌다.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다기보다 당장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적 완화는 ‘비상 수단’이다. 금융위기가 긴박하게 닥친 상황이 아님에도 이를 꺼내든 건 연준 역사상 처음이다. 미국, 그리고 이에 영향받는 세계 경제가 그간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시도엔 불확실성이란 위험이 따른다. 호니그 총재가 ‘악마와의 거래’라고 공격하는 이유다. 연준이 찍어낸 달러가 몰려들 아시아 등 신흥국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양적 완화에 대한 궁금증을 주요 키워드를 통해 살펴봤다.

비전통적(Unconventional) 수단

중앙은행의 대표적 경기 조절 수단은 기준금리다. 경기가 과열된다 싶으면 금리를 올리고, 식는다 싶으면 금리를 내려 경기 진폭을 줄인다. 마치 축구 경기에서 골키퍼가 수비수들의 위치를 조정해 위험에 대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양적 완화는 급작스러운 위기가 닥칠 때 쓰는 수단이다. 골키퍼가 골 에어리어를 넘어가 직접 수비수나 공격수 역할을 대신 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분류된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 ▶금융회사에 비상 자금을 공급하거나 ▶신용시장을 지원하고 ▶국채를 직매입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가 확산되면서 연준은 기준금리를 끌어내리는 동시에 양적 완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2008년 11월부터는 모기지담보증권(MBS), 다음 해 3월부터는 국채를 사들였다. 이것이 1차 양적 완화다.

 연준이 이를 다시 들고 나온 건 사실상 제로금리 상태라 금리 카드를 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재정적자 부담이 워낙 커진 데다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하면서 미국 정부 차원에서 재정정책을 적극 구사하기도 어려워졌다. 수비수들이 모두 손발이 묶인 상태라 어쩔 수 없이 골키퍼가 다시 골문을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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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디플레이션

미 연준은 2개의 렌즈를 통해 경제를 본다. 실업률과 물가다. 의회는 연준에 고용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물가는 안정적인 수준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현재 이 두 지표에는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실업률은 10%에 육박하고 있고, 물가상승률은 1% 남짓에 머물러 있다. 이대로 가다간 물가와 임금이 하락의 회오리로 빠지며 경제가 활력을 잃는 디플레이션 상태로 갈 수 있다는 게 연준의 판단이다.

 일본의 장기 불황을 깊이 연구한 버냉키 연준 의장이 느끼는 심각성은 더하다. 그는 과거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져들 경우 헬리콥터를 타고 공중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연준이 돈을 풀어 장기국채를 사들이는 건 장기금리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다. 금리가 떨어지면 가계는 미래를 위해 돈을 저축하기보다 당장 소비하고, 투자로도 눈을 돌린다. 기업 중에도 싼 이자로 돈을 빌려 투자와 생산을 늘리는 곳도 늘어난다. 1조7000억 달러가 들어간 1차 양적 완화 때는 10년물 미국 국채가 0.3~1%포인트 떨어졌던 것으로 관측된다.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

양적 완화의 ‘원조’는 일본이다. 1980년대 거품 붕괴로 경제가 급속히 불황으로 빠져들자 일본은행은 90년 6%이던 기준금리를 93년 1.75%로, 95년 다시 0.5%까지 떨어뜨렸다. 이 상황에서 경기가 살아날 조짐이 없자 2001년부터 동원한 게 양적 완화다. 금융권에 자금을 직접 공급하면서 은행 도산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드는 등 효과가 있었다.

 2003~2007년 연 2%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잃어버린 10년’에서 탈출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 세계 금융위기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고, 지금도 디플레이션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경기가 쉽게 살아나지 않는 건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경기 비관론이 걷히지 않고, 디플레이션이 오면 아무리 금리를 낮추고 시중에 돈을 풀어도 기업과 가계는 돈을 쥐고 있으려 한다.

 이미 미국도 함정에 빠져 있어 양적 완화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통화량만 늘고 경기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태그네이션(stagnation·장기침체)만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플랜B

연준이 제시한 6000억 달러 규모의 양적 완화는 시장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연준은 발표 전 이미 시장 관계자들에게 적정 수준을 묻는 설문을 하는 등 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한 ‘조율’을 해왔다.

 하지만 6000억 달러로 끝날지는 미지수다. 골드먼삭스는 연준의 목표인 실업률을 정상 수준으로 돌려놓기 위해선 4조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규모로 별 효과가 없을 경우 돈을 더 퍼부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의 빌 그로스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양적 완화는 일종의 폰지 사기”라고 힐난했다. 폰지 사기는 투자 손실을 또 다른 투자자로부터 돈을 걷어 돌려 막는 금융사기다. 양적 완화로 충분한 효과가 나지 않을 때 다른 대안으로 거론되는 건 인플레 기대심리를 부추기는 것이다. 장래에 물가가 오를 것이란 기대가 퍼지면 경제주체들은 소비나 투자를 앞당긴다. 찰스 에번스 시카고 연준 총재는 “향후 몇 년간 물가 상승 목표치를 제시해 단기적인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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