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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가스 규제] 중. 속수무책 정부·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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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이렇게 빨리 교토의정서가 발효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 했다." 곽결호 환경부 장관이 지난달 한 시민단체 주관으로 열렸던 교토의정서 관련 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준비가 덜 돼 있음을 시인한 것이다. 정부도 대응 체계는 세웠다. 국무총리 산하에 환경부.산업자원부 등 관계부처 장관들로 구성된 기후변화협약대책위원회를 운영 중이다. 지난달에는 국제 협상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대학원을 만들겠다는 등의 대책도 발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온실가스 배출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등의 보다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미루고 보자'식 대응=5월 19일 독일 본에서는 '유엔기후협약 부속기구회의'가 열린다. 한국을 비롯 세계 각국 정부 대표가 모여 2013년 이후 각자 얼마나 온실가스를 줄일지 논의하는 자리다. 한국은 여기에서 거센 감축 요구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부터 감축해야 하는 선진국들을 빼면 한국이 가장 발전한 나라인 데다, 온실가스 배출량도 세계 9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 회의에 구체적인 협상안을 내지 않기로 했다. 협상안을 마련하지 못해서다. 정부의 종합 대책에는 '상반기 중 협상 대책의 골격을 마련한다'는 막연한 내용만 있다.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현재 업체들을 대상으로 온실가스 배출 실태 등을 조사 중"이라며 "연말께 조사가 끝나면 이를 토대로 국무조정실.외교통상부.환경부 등과 협의해 협상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올 11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릴 두 번째 국제 협상에도 협상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유엔기후협약기구는 2013년 이후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 국가와 감축량을 2007년 확정한다.

5월의 국제 협상을 앞두고 정부 담당 간부도 줄줄이 바뀌었다. 5월 독일 회의에서 대표를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외교통상부 환경과학심의관이 이달 초 바뀌었고, 환경부 지구환경과장과 산자부 자원정책심의관 등이 올 들어 모두 교체됐다. 협상을 제대로 할지 불안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부는 또 지난해 말 산업계와 공동으로 산자부 산하에 발전.정유 등 8개 산업 대책반을 만들어 업종별 특수성을 감안한 대책을 세우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대책반별로 한 번 정도 회의를 했을 뿐 구체적인 대응 방안 등은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다.

국무조정실 관계자는 "한국이 적극적으로 온실가스 대책을 추진한다고 알려지면 선진국들이 더 강한 감축 부담을 지울 우려가 있다"면서 "준비 내용을 가능한 한 외부에는 밝히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대비를 다져나간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정부의 대처에 기업들은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한 정유 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어느 정도 감축을 목표로 협상을 벌일지를 밝혀야 그에 맞춰 감축시설 투자 계획 등을 세울 텐데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손 놓은 기업들=지난해 말 대한상공회의소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기업 184개사를 대상으로 교토의정서 관련 설문조사를 했다. 온실가스 규제가 시작됐을 때 영향을 많이 받을 업체만 골라 조사한 것이다. 그런데도 셋 중 하나(32.4%)는 '교토의정서가 뭔지 잘 모른다'고 답했다. 또 '대비가 전혀 없다'는 회사가 약 60%였다. '정부가 알아서 하겠지'하는 식으로 눈치만 보면서 대책 수립에는 손을 놓다시피 한 것이다.

우리 기업들이 유럽연합(EU) 등의 무역규제에 잘 대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EU는 자동차.전기.전자 등의 분야에서 에너지 효율이 높은 제품만 수입할 계획이다. 자국 내 에너지 소비를 낮춰야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경우 2009년부터 우리가 EU에 수출하는 차량은 1㎞를 달릴 때 이산화탄소(CO2)를 140g보다 적게 내뿜어야 한다. 하지만 경차가 아니고서는 이 기준을 맞출 수 없다는 게 업계의 고백이다. "멋모르고 말려들어 협약을 맺었다"(현대차 관계자)는 한탄까지 나온다.

EU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주가 2009년부터 나오는 자동차는 배기가스를 지금보다 22% 줄여야 한다는 법안을 최근 통과시키는 등 주별로 배기가스 규제에 나서고 있다. 이는 EU보다 더 강한 기준이다. 자동차 수출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EU와 미국에서 판로가 막힐 수도 있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대책은 동력원으로 휘발유와 전기를 함께 쓰는 하이브리드카를 개발하는 것. 하지만 이 분야에서 우리 기술은 선진 업체에 10년 가까이 뒤졌다. 현대차는 2006년에나 시판힐 계획인 반면, 도요타는 이미 1997년 양산에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2012년께 약 1조달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친환경 자동차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맥을 못 출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강철구 이사는 "미국 정부는 배기가스가 적은 청정 자동차 개발에 한해 4000억원 이상을 지원한다"며 "우리도 현재 수십억원 수준인 정부 지원을 대폭 늘려야 온실가스 규제 시대에 업체들이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 기업도 변화에 더디기는 마찬가지다. 영국의 BP 등 선진 에너지 기업들은 온실가스 규제 시대에 대비해 천연가스(LNG)와 수소연료 등 청정에너지를 개발.보급하는 쪽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국내 최대 에너지업체인 SK㈜가 2010년께 시범용 수소연료 충전소를 하나 세운다는 계획 정도가 전부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수소자동차를 구입해 시범운영하는 등 수소연료 수요가 생긴다는 보장이 있어야 이 분야에 투자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주.박혜민.최준호 기자

*** '2008년 감축' 의무국들 살펴보니

일본이나 EU처럼 우리보다 앞서 2008년부터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여받은 나라들은 어떤 상황일까. 일본은 비상이 걸렸으나 EU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교토의정서로 인해 일본은 2008년 온실가스 배출을 1995년 대비 6% 줄여야 하게 됐다. EU는 8%다. 그러나 의정서 체결 뒤 산업계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협약을 맺은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 기업들의 에너지 효율이 EU보다 높아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돈이 훨씬 많이 들기 때문이다. 업계는 협약 전 조사를 통해 이 같은 문제를 파악하고 2008년 배출량을 1995년과 같이 가져가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환경담당 부처가 국제 여론을 생각해 더 많이 감축하겠다고 했다가 손해를 보게 됐다.

반면 EU는 감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 실제 독일은 옛 동독의 낡은 설비들을 고쳐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만 해도 EU 평균 감축 목표(1990년 대비 -8%)를 무난히 달성한다. 프랑스는 전기를 만드는 데 원자력을 많이(77.5%) 쓰기 때문에 이산화탄소 배출 걱정이 없다. 영국은 북해산 원유가 줄어들면서 진작부터 석유나 석탄보다 이산화탄소를 훨씬 덜 내는 LNG로 에너지원을 바꿔왔다. 이들 국가는 이미 대비가 완료된 셈이다. 교토의정서에 따라 EU가 일본 등에 상대적인 경제 이익을 보는 것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교토의정서가 '환경 협약'이 아니라 '환경을 명분으로 한 경제 협약'이라는 시각도 있다.

2001년 미국이 교토의정서에서 탈퇴한 것도 EU에 비해 에너지를 많이 쓰는 자국 산업계가 훨씬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판단한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로 인해 '제일 잘 사는 나라가 환경을 도외시한다'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결국 미국도 2012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2년의 약 80%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독자적으로 발표했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약점을 모두 안고 있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중화학공업 비중이 큰 데다 이들 중화학공업의 에너지 효율은 거의 일본에 육박할 만큼 높다. 이 때문에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지게 되면 미국.일본 이상의 어려움이 예상된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현진 박사는 "현재 일본 내 일각에서는 미국처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감축 목표를 정해 추진하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면서 "우리도 산업계의 온실가스 저감 능력 등을 이른 시일 안에 파악해 후회하는 협약을 체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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