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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유권자에 쏠린 미 정가의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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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지난달 뉴욕 한인 사회는 얼떨떨했다. 중간선거를 앞둔 연방의원 출마자의 뜨거운 구애(求愛) 때문이었다. 과거에도 선거는 수도 없이 치렀다. 그렇지만 이번처럼 여야 가릴 것 없는 열렬한 애정 공세는 처음이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뉴욕 원조 코리아타운 플러싱의 오픈센터. 민주당 개리 애커먼 연방 하원의원과 공화당 제임스 밀라노 후보가 처음 마주앉았다. 후보자 토론을 위해서였다. 애커먼은 28년째 뉴욕주 연방의원이다. 이에 비해 밀라노는 정치 신인이다.

 밀라노의 거듭된 공개 토론 요구에도 꿈쩍 않던 애커먼을 토론장으로 이끈 건 한인 유권자였다. “애커먼은 한인 사회에 도통 무관심”이라는 밀라노의 힐난에 애커먼이 발끈한 것이다. 애커먼은 토론회 주관을 한인 풀뿌리 정치운동 단체인 한인유권자센터(KAVC)에 직접 요청했다. 지난달 20일엔 뉴욕주 6선 연방 하원의원 스티브 로스맨이 한국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 서명한 110명의 미 의원 중 한 명이란 소식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내로라하는 미 정가 거물이 앞다퉈 한인 사회에 추파(秋波)를 던지고 나선 까닭은 뭘까. 한인 유권자의 힘이 강해져서다. 과거 10%대에 머물던 한인 유권자의 투표율이 최근엔 40% 안팎으로 껑충 뛰었다. 게다가 한인 사회에선 몰표가 나온다. 숫자는 적어도 박빙(薄氷)의 승부에선 무시 못할 힘이다. 17년에 걸친 KAVC의 풀뿌리 정치운동도 밑거름이 됐다. 그동안 뉴욕·뉴저지주 거리에서 모은 한인 유권자 등록만 3만5000여 명에 달한다. 애커먼 의원이 KAVC에 후보자 토론 주관을 부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풀뿌리 정치운동은 이번 미국 중간선거의 키워드이기도 했다. 보수주의 풀뿌리 운동인 ‘티파티(TEA Party)’는 이번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풀뿌리 운동이 미국 선거판을 뿌리째 흔들 수 있었던 건 2005년 시행된 ‘소프트머니 금지법’이 계기가 됐다. 공화당 존 매케인과 민주당 러셀 파인골드 상원의원이 입안한 이 법은 기업·개인의 거액 후원금을 금지했다. 뭉칫돈이 끊긴 정치인으로선 다수의 ‘개미’ 후원자나 비영리(NGO) 후원단체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됐다.

 그 덕에 풀뿌리 운동의 힘도 세졌다. 2007년 7월 미 연방 하원에서 ‘일본 종군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것만 봐도 그렇다. 워싱턴 정가를 상대로 한 로비력에서 한인 사회는 일본의 상대가 못 된다. 더욱이 위안부 결의안 저지를 위해 당시 일본은 인맥·금맥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막강한 일본의 로비도 한인 유권자의 표를 앞세운 풀뿌리 정치운동의 힘 앞에선 맥을 못 췄다.

 풀뿌리 정치시대는 한인 사회에도 도전이자 기회다. 유권자의 힘만 모은다면 과거엔 꿈도 못 꿨던 일도 이룰 수 있다. 반대로 유권자가 모래알처럼 흩어진다면 한인 사회의 위상은 나락으로 추락할지 모른다. 앞으로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