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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있는 아침 ] - '탕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가끔씩 난

똑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해.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러면 어떤지 알아?

하드보일드하게 지루하지 뭐.

전인권의 <행진>을 탕진으로 바꿔 부르는데

그것도 지루하면 펭귄으로 불러

그럼 정말 썰렁해지지.

전인권은 왜 행진에서 한 발짝 더 나가지 못했을까?

그러면 탕진이 됐을 텐데

스카이 라이프 광고에서 선글라스를 벗은 전인권은

애송이 개그맨의 폭탄 맞은 개그 같아.

펑크스타일로 뇌쇄적이야.

제대로 서글프다는 이야기지.

그 폭탄 머리를 만드는 데

노련한 코디네이터가 몇 시간을 주물러댄다지?

그의 선글라스를 벗길 수 있는 건

태양도, 비도 섹시한 허벅지도 아니야.

스타일리스트로 사는 것도

돈 앞에선 귀찮아진 거겠지.

하지만 누가 그를 비난하겠어?

탕진을 흥얼거리며 스니커즈가 닳도록 걷다가 문득,

지금 내가 부르는 이 노래는

원유를 잔뜩 부은 베트남 식 커피 같아.

하드보일드하게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지.

그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써버리겠어

아무것도 아끼지 않겠어.

우리동네 미대사관 앞 전경 아저씨들도 탕진!

우리 삼촌을 닮은 과일가게 총각도 탕진!

붕어빵 파는 뚱뚱한 아줌마도 탕진 !

피스!로 인사를 대신하던 시대는 갔어

아무리 외쳐도 평화 따윈 오지 않잖아?

탕진!

문혜진(1976~), '탕진'

어른들은 지루해. 탕진할 게 없잖아. 펭귄은 있지. 뒤뚱뛰뚱 걷지만 헌신적인, 말쑥한, 그런 펭귄은 있지. 그렇지만 그런 펭귄도 탕진하고 싶을 거야. 탕진할 젊음, 탕진할 무모함이 있다면 나이 든 펭귄도 멋질 거야. 그러니까 큰소리로 불러 줘. 탕진! 내 몸 속에 누워있는 어른들이 듣도록. 더 늦기 전에.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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