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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0년 -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 中. 자본주의의 사회적 병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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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모스크바 코시기나 거리에 위치한 아를료녹 호텔의 카지노 "드 파리"내부 풍경.

13일 오후 6시쯤 모스크바 남쪽 코시기나 거리에 있는 호텔 '아를료녹'. 주차장 200여 면이 벤츠.BMW.아우디 등 외제차들로 꽉 차 있다. 대부분 호텔 1층에 있는 카지노를 찾아온 러시아인 손님들이다. 이 호텔은 소련 시절 공산당청년동맹의 숙박시설이었다.

2003년 호텔 민영화 과정에서 문을 연 카지노 '드 파리'는 최근 확장을 통해 모스크바 최대 규모의 도박장이 됐다. 1층 홀 전체에는 50여 개 게임 테이블과 500여 대의 슬롯머신이 있다. 한쪽 무대에선 반라의 미녀 가수들이 악기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도박에 정신이 팔린 손님들은 테이블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모스크바는 '카지노 천국'=소련 시절 카지노는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몇 군데 호텔에만 있었다. 그러나 개방 이후 도박장 설립이 자유화되면서 현재 모스크바에만 60여 곳이 성업 중이다. 내국인 출입도 자유롭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수도에는 도박시설을 허가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모스크바가 라스베이거스.모나코.몬테카를로 등을 제치고 세계적인 도박도시로 떠오르고 있다"는 조소 섞인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러시아의 카지노 수입은 24억 달러였다. 2007년에는 90억 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 의료인 재교육센터 교수는 "모스크바 주민의 5%인 50만 명 정도가 도박 편집증 환자"라고 밝혔다. 러시아 보건부의 심리학 전공의사인 블라디미르 볼로쉰은 "러시아의 도박 열풍은 숙명론에 쉽게 빠지고 모험을 즐기는 러시아인들의 천성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시민들은 "손쉬운 세수 확보를 위해 무분별하게 도박장 개설을 허용하고 있는 정부 정책도 문제"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은 "무엇보다 개방 이후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급속히 번진 금전만능주의와 한탕주의가 도박 열풍의 최대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매춘.향락업소=1990년대 초 호텔 입구에서 외국인들을 유혹하던 '인터걸'은 요즘 사라졌다. 한때 시내 대로에서 행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던 직업여성들도 보기 힘들다. 90년대 중반 이후 모스크바 시내와 교외에 무더기로 생겨난 유흥업소들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시내 중심가에는 입장료만 50~100달러(약 5만~10만원)씩 하는 고급 클럽들이 생겨났다. 클럽은 배우 뺨치는 늘씬한 미인들을 고용해 각종 퇴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건강센터 역할을 했던 사우나의 상당수도 퇴폐업소로 전락했다. 업소에 고용된 직업여성들이 손님들에게 술 시중을 들거나 매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러시아의 유흥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돈벌이를 찾아 외국으로 나갔던 러시아 미녀들이 본국으로 되돌아 오는 유턴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뿌리내리는 마피아=개방 초기처럼 수십 개의 군소 조직들이 세력다툼을 벌이며 길거리에서 총싸움을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 보호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던 '잔챙이' 마피아들도 사라졌다. 대신 일본 야쿠자, 중국 삼합회처럼 대규모화하고 기업형으로 바뀌고 있다. 힘있는 정치인.기업인들과 유착해 유흥업은 물론 무기거래.통관업 등 막대한 수익이 나는 분야로 진출하고 있다.

일부는 축적한 부를 이용해 의원.지방자치단체장 등으로 정치권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10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교민 이모씨는 "외국인들이 멋모르고 이권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마피아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거나 살해당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 술 소비 다시 늘어 금주 치료요법 인기

러시아에서 금주(禁酒)를 위한 독특한 치료법들이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한동안 주춤했던 술 소비량이 또다시 증가하면서 많은 사람이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공산당 서기장 취임 이후 개혁의 첫 작업으로 '금주법'을 공포했다. 국민의 고질적 음주가 소련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보드카 가격을 대폭 인상하고 주류 판매를 제한했으며 밀주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이후 알코올 소비가 크게 줄었다. 그러나 91년 소련 붕괴 이후 주류 생산에 대한 국가독점이 사라지면서 러시아인의 음주량은 또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개혁 과정의 혼란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무절제한 음주를 부추겼다.

지난해 러시아인의 술 소비량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국가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인당 연간 7ℓ의 알코올을 섭취한 것으로 조사됐다. 비공식 통계로는 14.3ℓ에 이르렀다. 알코올 중독자 수가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독특한 치료법을 내세운 전문 의료기관들이 성업 중이다. 모스크바에만 이런 센터가 500여 개나 된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신경전문의인 블라디미르 도브젠코가 고안, '도브젠코 요법'으로 불리는 최면요법이 있다. 4~5분 정도의 최면 시술을 통해 환자에게 술에 대한 혐오증이나 공포감을 심어주는 시술법이다. 고르바초프의 금주법 시행과 함께 공식적으로 시술되기 시작했다. 1회 치료비가 100달러(약 10만원) 정도다.

수술 요법도 있다. 알코올과 마찰을 일으키는 화학약품을 함유한 캡슐을 정맥 내에 집어넣는 치료법이다. '시술 후 술을 마시면 건강에 이상이 오거나 사망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환자의 동의를 얻어 시술한다. 수술비는 130달러 선. 그러나 실제 치료율은 60% 이하라는 것이 객관적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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