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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즐겨읽기] '공산당 선언'도 올린 현란한 에세이 잔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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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문학강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472쪽, 1만5000원

책 이름이 강의로 끝난다. 그렇다면 문학이론서나 평론일 수 있겠다. 하지만 한 편의 기다란 반성문으로 읽히기도 하고, 칠순 노인이 화려했던 지난날을 으스대며 써내려간 자서전 냄새도 난다. 아니 그 현란한 인용을 보고 있자면 격식없이 풀어낸 서양문화사도 떠오른다.

책을 한 마디로 규정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73)여서 그렇다. 박학다식함으로 따지자면 세상에서 둘째라고 부르기 힘든 그 에코가 문학에 관하여 쓴 에세이여서 그렇다.

책은 바야흐로 자유분방하다. 단테의 '신곡'에서 '천국'편만 따다 칭찬을 늘어놓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영국 문학의 전통을 찾기도 하고, 10대 중반 이후 30년 동안 문학을 끊고 살았던 사연을 털어놓기도 한다. 특히 습작을 쓰던 10대의 일화는 꽤 흥미롭다. 아니 흥미롭다기 보다는 그 천재성에 기가 눌린다는 게 맞겠다.

15살에 썼다는 '젊은 시절 우주의 옛날이야기들'이란 소설이 있다. 은하계 탄생 직후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주인공인데, 어느날 태양을 너무나 사랑한 금성이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 태양의 뜨거운 덩어리 속으로 달려간다는 줄거리다. 이런 작품도 있다. 베토벤이 지휘하고, 리스트가 피아노를,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재즈 연주자 루이스 로버트슨이 트럼펫을 연주하는 '콘서트'라는 소설을 그맘 때 구상했단다. 이와 같은 습작이 훗날 '푸코의 진자'같은 작품의 밑거름이 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맨처음 눈에 들어온 건 '공산당 선언'을 문학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에코에 의하면 '선언'은 '오늘날 광고 학교에서 꼼꼼하게 분석해야 할 텍스트'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는 '선언'의 서두는 '베토벤의 교항곡 5번처럼 가공할 만한 고막의 울림'을 지닌 효과적인 슬로건이란다. 여태 숱한 사회과학자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인용했지만, 아니 그 '선언'대로 세상을 바꾸기도 했지만, 에코처럼 '선언의 문체'를 언급한 건 처음 봤다.

책은 에코의 최근 에세이와 강연 내용 등을 18편 글로 묶었다. 에코의 작품은 읽기에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재미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소설을 어떻게 썼습니까'라고 묻자 에코가 답했단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썼지요.'잊지 마시라. 당신은 지금 에코를 읽고 있다. 유머는 건재하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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