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59. '노는계집 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 1997년 영화 "노는계집 창"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신은경씨.

1996년 세무사찰 때 나는 22억원을 추징당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해당하는 탈세범의 경우 추징액을 납부해야만 석방 조건이 된다. 하지만 현금 22억원을 당장 조달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은행에서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겠지만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이때 평소 거래하던 신한은행의 임금택 지점장이 생각났다. 나를 볼 때마다 "좋은 영화 만드세요.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지탄을 받는 탈세범 신세가 된 나에게 그때 한 말을 지킬 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밑질 것 없다는 생각에 아들에게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이튿날 바로 30억원을 신용으로 빌려주었다. 그만한 금액이면 본점 결재 사항이라 대출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상부에 얘기를 잘 한 모양이었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참 인복(人福)이 많았다. 이에 대해 늘 감사해 한다. 인생의 고비고비에서 위기 때마다 따뜻한 도움을 준 분들이 있어 이나마 부끄럽지 않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부산 피란시절 주리고 헐벗었을 때 국제시장 한켠에 좌판을 열 수 있게 허락해준 이름 모를 아저씨와 함경도 아주머니, 의정부 등지를 방물장수로 떠돌 때 어여삐 여겨 한 푼이라도 더 얹어주려고 했던 상인들…. 이름과 거처를 알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가 엎드려 절하고 싶도록 고맙고 정겨운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보면 '어떻게 좀 힘이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솟아난다.

탈세로 한 달간 구치소에 있는 동안 유명 스타가 음주 운전으로 걸렸다는 기사가 잇따라 실렸다. 농구 선수 허재와 탤런트 신은경이었다. 특히 드라마 '종합병원'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신은경은 그 사건으로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언론에서는 '공인의 잘못된 자세' 운운하며 그를 공격했다. 당시 드라마와 광고 출연으로 1년에 15억원을 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할 상황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나는 출소하자마자 그를 식당으로 불러내 "낙담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배역을 준다거나 하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잘 나가던 젊은 배우가 졸지에 상처를 입는 게 가슴 아파서 다독거려주려는 뜻이었다.

나는 그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도 찾아갔다. 신은경이 재판받는 모습을 찍기 위해 사진기자와 방송사 카메라가 대거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몸싸움이 벌어지고 신은경의 모습도 '예쁘지 않게' 찍히겠다고 판단한 나는 기자들에게 제안했다. "우리 포토라인을 정합시다. 신은경이 오면 여기 이 위치에 세웁시다. 사진 찍을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 질서정연하게 합시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재판을 마칠 수 있었다.

그 무렵 임권택 감독이 윤락가로 흘러든 여인의 사연을 다룬 '노는계집 창'을 만들겠다고 했다. 추측컨대 임 감독은 내가 세무사찰을 받은 데다 현금 20억원도 없어 쩔쩔매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평소 내가 돈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으니 형편을 몰랐다가 의외로 태흥영화사가 돈에 쪼들리는 데 놀랐던 게 아닌가 싶다. TV에서 '퇴출'당해 실의에 빠져있던 신은경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로 나는 임 감독의 예상대로 추징당한 세금 만큼의 돈을 벌었고 신은경도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