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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에 물린 팔뚝 잘라내듯 과감히 개혁 추진해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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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당당하되 자만에 빠지지 않고
(自豪不自滿)
드높게 일을 추진하되 떠벌리지 않고
(昻揚不張昻)
실질에 힘쓰되 조급해하지 않는다
(務實不浮躁)”

중국의 차기 지도자 시진핑(習近平·57) 국가 부주석의 좌우명이다. ‘겸손한 태자당(太子黨:당·정·군 간부의 자녀 그룹)’이라는 별명에 어울린다. 그는 다른 태자당이 권력의 중심을 고집할 때 지방으로 내려갔고, 다른 고위 간부들이 허세를 부릴 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홍콩 언론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도 나온다. G2(주요 2개국)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될 중국을 이끌 시진핑, 그가 펼쳐갈 정책에 세계 이목이 모아지고 있다.

2006년 9월 19일. 저장(浙江)성 당서기 시진핑은 귀빈을 맞는다. 헨리 폴슨 당시 미국 재무장관이었다. 그해 골드먼삭스에서 자리를 옮긴 그는 중국을 70여 차례나 드나든 ‘중국통’. 장관 취임 후 첫 번째 중국 방문 도시로 베이징이 아닌 항저우를 선택한 것이다. 덕택에 제5세대 리더 가운데 다크호스였던 시진핑은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도대체 무슨 사이이기에…’.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두 사람은 5년여 전 투자 문제로 만난 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오랜 친구(老朋友)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폴슨이 미국 재무부 관리들을 유력한 후계자 시진핑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 항저우로 달려갔다”고 분석했다. 시진핑이 구축하고 있는 ‘해외 인맥 쌓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폴슨 장관은 시진핑에 대한 평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당시 이렇게 답했다.

“골 넣은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The kind of guy who knows how to get things over the goalline).”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일을 적절히 처리할 줄 아는 정치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시진핑은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승진함으로써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그는 이변이 없는 한 2012년부터 10여 년간 중국을 이끌게 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골을 넣는 ‘선수’임을 거듭 입증한 것이다.

세계 곳곳 다녀 국제적 감각 겸비
최고 권력을 놓고 벌어졌던 시진핑-리커창(李克强)의 경쟁 레이스는 시 부주석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끝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정책을 둘러싼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지적이다.

중국 리더십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톤차이나센터의 리청(李成) 박사는 중국 정치권을 ‘엘리트(Elite) 그룹’과 ‘대중(Populist) 그룹’으로 양분한다.
엘리트 그룹에는 동부 연안 경제개발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둔 태자당 출신의 정치인이 많다. 그들은 경제발전을 이뤄봤기에 분배보다는 성장에 관심이 많다.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정책을 선호한다. 반면 대중 그룹은 내륙에서 성장했거나 중앙권력 주변에서 맴돈 정치인이 많다. 리커창 부총리 등 ‘공청단 출신 인사(퇀파이·團派)’가 주요 구성원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그랬듯 이들은 성장을 중시하면서도 조화를 강조하고, 노동자 복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리 박사는 설명한다.

태자당에 속한 시진핑은 엘리트 그룹의 전형이다. 푸젠(福建)-저장(浙江)-상하이 등 개방 선도 지역에서 정치적 입지를 굳힌 그는 기업 자율성을 강조하고, 외국 기업에도 관대하다. 그가 ‘자유주의 성향의 친(親)기업 정치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경쟁자 리커창 부총리가 거의 해외를 나가지 않는 데 비해 시 부주석은 지방관리를 할 때나 중앙정계에서 활약할 때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적을 만들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
시진핑의 경제정책 성향을 정확히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의 주된 정치무대였던 푸젠·저장성에서의 활동으로부터 가늠할 뿐이다. 그중 ‘양조론(兩鳥論·두 마리 새 이론)’이라는 게 있다.

“전설상의 불사조(봉황)가 불에 뛰어들어 더 화려하게 재생하듯 산업 체질을 환골탈태해야 한다. 새장을 들어올려 참새를 바꾸듯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뤄내야 한다. 독사에 물린 팔뚝을 잘라내듯 과단성 있게 경제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그가 상하이 당서기로 자리를 옮기기 1년 전인 2006년 3월 관영 매체인 CC-TV의 ‘중국경제 대강단’ 프로그램에 나와 한 말이다. 산업 체질 강화와 구조조정이라는 두 마리 새를 키우자는 얘기였다. 경제개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시 부주석이 후 주석의 중앙권력과 대립각을 세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앙정부 정책을 가장 먼저 이해하고, 추진한 지방 관리로 평가받고 있다. “당의 통치를 유지하고, 당의 단결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게 그의 정치관이다. 그는 2004년 후 주석이 균형성장·빈부격차 축소 등을 핵심으로 한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과 화해사회(和諧社會)를 주창하자 ‘절강화해(浙江和諧)’라는 구호로 답했다. 중앙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선언이었다. 후 주석이 시진핑을 상하이 당서기로 끌어올린 이유 중 하나다. 홍콩의 정치분석가 우밍은 “후 주석이 장쩌민의 지도노선을 충실히 따르며 때를 기다렸듯, 시진핑 역시 시기를 기다릴 줄 아는 정치인”이라며 “남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시 부주석의 생리에 맞지 않다”고 분석했다.

‘국부에서 민부로’
이번에 열린 제17기 5중전회에서는 12차 5개년 계획(2011~2016년)의 밑그림도 제시됐다. ‘국부(國富)에서 민부(民富)로’가 핵심이었다. 이는 후 주석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시 부주석이 실행할 경제정책의 방향이다. 그가 12차 5개년의 후반부를 책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배경은 이렇다. 중국은 지난 30여 년간 ‘부강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춰 왔다. 그런 과정에서 국가(정부)-국유기업-국유은행으로 이어지는 ‘성장의 삼각편대’를 형성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국진민퇴(國進民退·국가의 역할 증대와 민간기업의 퇴출) 현상이 심화됐다. 국가가 자원을 장악하는 경제구조에서 국유기업은 더욱 강해졌고, 고용의 70%를 담당하는 민영기업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국가(국유기업)는 배부르고 국민(민영기업)은 헐벗은 꼴이다.

이런 국가 주도형 성장 시스템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게 당 지도부의 생각이다. 민부 노선이 나온 배경이다. 자유주의 성향의 천즈우(陳志武) 교수는 “국유체제가 전체 생산량의 60~70%를 차지하고, 전체 국부의 4분의 3을 국가(정부)가 관리하는 이 상황은 시장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의 부(富) 독점은 부패를 낳고, 국가-국유기업-국유은행은 ‘부패의 트라이앵글’로 변한다는 주장이다.

민부 노선의 핵심은 성장 혜택을 민간이 누릴 수 있도록 경제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 동력을 기존의 투자·수출 위주에서 내수 중심으로 바꾸고, 친환경·첨단기술 분야를 집중 육성해 지속가능한 발전체제를 갖추자는 취지다. 노동자 복지 향상을 위해 최저임금도 크게 오를 것으로 보인다. 후 주석의 ‘과학발전관’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진핑은 민간의 자율성 확대에 방점을 찍는다. 민간 기업·자본에 대한 규제를 풀어 부의 균형추를 민간 쪽으로 돌리자는 것이다. 중국 리더십 전문가들은 그러나 “시진핑은 후진타오로부터 권력을 완전히 물려받기 전까지 자신의 색깔을 노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후 주석이 자신의 지도노선인 과학발전관을 집권 2년 뒤에야 제시했듯 말이다. 중국 지도층은 ‘나무가 수풀보다 빼어나면 반드시 바람에 꺾인다(木秀於林 風必<6467>之)’는 평범한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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