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만 하다 죽으면 억울하죠, 즐기면서 삽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9호 12면

밴드 경연대회 하루 전인 22일 오후 9시 조한서씨가 서울 강동구 성내동 지하 합주실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수술 후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된 그는 기타 선율이 목소리와 같다고 말했다. 신인섭 기자

조한서(39)씨가 ‘스읍~’하고 침을 삼키며 기타 줄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평소 말을 할 때도 5~6초에 한 번씩 ‘스읍~’ 하며 침을 삼킨다. 도로교통 시설물 제작업체에서 설계를 담당하는 그는 11년 전 설암(舌癌) 수술을 받았다.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혀와 턱의 80%를 잘라내 아래쪽 입안에는 어금니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말을 하면 침이 새기 때문에 자주 침을 삼켜야 한다고 했다. 얼굴과 목에 흉터도 남았다. 이야기를 할 때는 발음이 불분명해 “네? 뭐라고요?”를 반복해야 했다.

음악으로 설암(舌癌) 극복한 직장인 밴드 ‘Take a Flight’ 리더 조한서씨

그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기타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징~지직 지지지지직” 전자 기타 소리를 신호로 드럼, 베이스, 키보드의 연주가 시작됐다. 23일 오후 3시 서울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열린 낙원상가배 제2회 직장인밴드 경연대회의 첫 번째 참가팀 무대였다. 전국 50여 개 직장인 밴드가 인터넷을 통해 예심을 봤고 그중 본선에 오른 8개팀이 이날 실력을 겨뤘다. 조한서씨가 리더로 있는 ‘Take a Flight’ 팀이 첫 번째 순서였다. 두비브라더스의 ‘long train running’이 조씨의 기타연주로 시작되자 주변에 모인 400여 명의 관객이 박수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어깨에 자기 키만 한 기타를 멘 여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며 공연을 지켜봤다.

두 번째 곡 와일드 체리의 ‘play that funky music’이 시작됐다. 밴드 멤버들은 서로 얼굴을 보고 눈으로 사인을 보내며 합주를 이어갔다. 하나같이 발로 박자를 맞췄다. 빨강ㆍ파란색 조명이 비춰지고 무대 뒤에서 하얀 연기까지 나오자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더 커졌다.

23일 오후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직장인 밴드 경연대회에 400여 명의 관객이 몰렸다. 신인섭 기자

10여 분간의 공연을 마치고 내려온 조씨는 “100%는 아니지만 80~90%는 한 것 같아요. 중간에 박자가 빨라진 게 마음에 걸리네요”라고 말했다. 무대에 오르기 30분 전부터 “무대에 올라가면 흥분해서 박자를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공연할 곡 박자를 몸에 익히려고 계속 듣고 있는 거예요”라며 ‘삑삑’ 소리가 나는 전자 메트로놈을 귀에 대고 있었지만 우려했던 대로 박자가 빨라져서 아쉽다고 했다.

직장인 밴드 참여하며 새 삶 찾아
조한서씨는 컴퓨터 회사 AS 기사였다. 직장생활 4년차이던 97년 어느 날 몸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머리도 아프고 술 먹으면 혀가 굳는 것 같더라고요. 왜 술 많이 마시면 혀가 꼬인다고 하잖아요. 근데 한두 잔 마셨는데도 그런 증상이 생기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 얼마간 지내다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서 검사를 했죠. 그런데 설암이라고 하더라고요. 술이랑 담배를 많이 하긴 했어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결국 그는 99년 11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때문에 98년 결혼 후 낳은 아들 돌잔치에도 가지 못했다. 26시간 동안 진행된 대수술로 암세포는 제거했지만 혀와 턱뼈의 80%를 들어내야만 했다. 조씨는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자신은 왼쪽 가슴이 없다고 했다. 가슴 근육을 잘라 혀에 이식했기 때문이다. 턱 뼈는 왼쪽 종아리 뼈로 이식했다. 그 때문에 걷는 것만 할 수 있고 달리거나 등산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마저도 수술 후 항암치료 과정에서 이식했던 뼈가 방사선에 녹아버렸다.

“2005년 복원수술은 오른쪽 종아리 뼈를 턱에 이식했어요. 복원수술을 할 때까진 턱이 없어서 얼굴 아래쪽이 완전히 함몰돼 있었어요. 정말 흉측했죠. 그 얼굴로 밖에 나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래서 집에만 있었어요. 우울증에 대인기피증도 생겼죠. 매달 병원비는 수백만원씩 드는데 일도 못하고… 아파트에서 빌라로, 빌라에서 반지하로 옮겨갔어요. 그러다 아내랑도 이혼하게 되고….”

조씨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음악이었다. 조씨는 “설암이 예후가 아주 안 좋아요. 수술 후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옆에 누워있던 사람들이 죽어서 병실을 나가는 모습을 여러 번 보게 됐어요. 어휴. 그 기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이대로 죽으면 저 세상 가서 참 많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먹고살기 바빠 돈만 벌다가 죽어버리면 얼마나 억울해요. 그래서 병원에서 살아 나갈 수만 있으면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즐겁게 살 거라고 다짐했어요”라고 말했다.

퇴원 후 즐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를 찾던 그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때 동네 레코드 가게 아저씨에게 한 달간 레슨 받은 실력이 전부였던 조씨는 일단 인터넷에서 중고 기타를 구입했다. “제대로 배우고 싶은데 얼굴이 그러니 밖에 나갈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동영상 보면서 띵가 띵가 했죠.”

억눌렸던 감정 폭발한 첫 공연
수술 후 4~5년간 식사를 하지 못해 호스를 통해 영양분을 마셔야 했던 그는 2005년 호스를 떼고 죽이나 미음을 먹어도 될 만큼 몸 상태가 호전됐다. “호스를 뗐으니까 밖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기타 학원을 알아봤는데 레슨비가 너무 비싼 거예요. 그래서 직장인 밴드를 찾았죠. 거기에선 ‘선배’들이 싸게 레슨을 해주거든요.” 결국 그는 ‘오블리가토’라는 직장인 밴드에 들어가 기타를 배우게 된다.

밴드에 들어가기까지 그는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정말 쉽지 않았어요. ‘비장애인들 모임에 내가 가도 될까. 내 얼굴이나 발음 때문에 거부감이 들진 않을까.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컸어요. 근데 음악을 꼭 해야겠단 생각에 큰 용기가 난 것 같아요.”

밴드 활동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조한서씨는 2006년 4월 도로시설물을 만드는 회사 ㈜이안씨앤에스에 입사했다. 몇 년 전부터 재택근무 아르바이트로 컴퓨터 작업을 해오던 곳이었는데 채용공고가 나온 걸 보고 용기를 낸 것이다.

조씨는 2006년 가을 첫 공연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신촌의 한 공연장에 동호회 회원 4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걱정도 됐고, 기타를 쳐야 하는데 긴장해서 손이 덜덜 떨렸죠(웃음). 틀리지만 말자고 생각하며 공연했던 것 같아요.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운드가 모여 하나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걸 무대에서 느꼈어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 하더라고요. 많이 억눌려 있었나 봐요. 그게 한번에 터져나온 것 같아요. 그 쾌감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 맛에 음악 하는 거죠.”

이후 조씨는 2007년 10월 천예원(39ㆍ드럼ㆍ웹디자이너)씨와 함께 이날 대회에 참가한 ‘Take a Flight’ 밴드를 결성했다. 이후 여러 차례 멤버가 바뀌었지만 두 사람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직장인 밴드는 출장이나 부서 이동, 전근으로 멤버 구성원이 오래 지속되기 힘든 점이 있다고 했다. 이 팀 역시 전에 있던 여자보컬은 임신해서, 기타리스트는 회사를 이직하면서 밴드에서 빠졌다. 하지만 동호회를 중심으로 곧바로 충원이 된다고 했다. 이날 대회에 출전한 멤버가 모인 것은 약 두 달 전이다.

‘Take a Flight’ 밴드는 이날 입상에는 실패했다. 조한서씨는 “괜찮아요. 상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 느껴지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너무 좋아요. 오늘 그걸 오랜만에 경험했네요”라며 “지금 저는 너무 행복해요. 병상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가졌어요. 회사도 다니고 다시 밥도 먹을 수 있고, 하고 싶은 음악까지 하고 사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