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다른 한국 위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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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호 30면

학생회 선거에 함께 출마하지 않겠니. 유머 감각으로 꽤나 인기 있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남학생의 제안이었다. 필자가 MBA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던 지난해 2월이었다. 학생회장 출마를 선언한 그 남학생은 총무 후보감을 찾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학생회 선거에서 내 몫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와튼 MBA 학생은 3분의 2가 미국인이다. 회장, 부회장 2명, 총무까지 네 명이 한 팀으로 출마한다. 인도나 남미 출신이 간혹 후보군에 끼지만 아시아 출신이 나서는 것은 보기 힘들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팀은 낙선했다. 전교생 앞에서 토론회를 벌였고 홍보 비디오를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지지자들과 함께 티셔츠를 맞춰 입고 수백 컵의 아이스크림을 직접 떠주기도 했다. 하지만 다섯 팀 중 3등에 그쳤다. 1년도 넘은 낙선 경험담을 꺼내는 이유는 애초에 왜 출마 제의를 받았는지 말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한국 학생들의 표 때문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한국 학생은 1, 2학년 1600명 중 60여 명뿐이다. 회장 후보였던 그 남학생은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서”라고 말했다. “한국은 제조업도 튼튼하고 금융위기도 두 번이나 극복했기 때문에 인상이 좋아. 중국은 미국과 정치적 문제가 있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적(敵)이 너무 많잖아. 네가 한국 사람이라서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선거 후에도 이 말을 확인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학교에서 마련한 금융위기 특강. 몇몇 교수가 한국 사례를 참고하자고 역설했다. 재무학의 대가로 유명한 어느 교수는 ‘한국 경제를 배우고 싶다’며 거꾸로 필자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전략 수업에서는 한국 전자업계의 선전에 대해 교수와 학생들이 난상 토론을 벌였다.

지난해 말 삼성의 글로벌 전략그룹의 채용도 와튼에서 화제였다. 한국계는 지원할 수 없고 서울에서 2년 일해야 한다는 조건에도 2학년 중 50여 명이 원서를 냈다. 와튼 학생 중 3분의 2가 투자은행이나 컨설팅 회사를 희망하는 걸 감안하면 꽤 많은 숫자다. 그중 서울행 티켓을 거머쥔 사람은 5명 안팎. MIT를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일했던 미국 친구 한명도 고배를 마셨다. 그는 “삼성을 1순위로 생각하고 인사 담당자를 만나러 한국까지 날아갔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물론 미국 주류사회가 한국에만 열광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최대 관심은 역시 수퍼 파워로 떠오르는 중국이다. 세계 경제가 아시아 위주로 재편되면서 한국 역시 주요 국가로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다음 달 서울에서 열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다. 교수들도 이제 한국을 ‘경제 강국’이라고 칭송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외국 학생들은 한국·중국 등 아시아에서 직장 경력을 쌓고 싶어 한다. 그 덕에 어깨를 쭉 펴고 다니는 것은 우리 유학생들이다. 한국인이라서 설움 받았다는 것은 옛말. 오히려 필자는 한국 사람이어서 덕 본 적이 더 많았다.

2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지난 7월 서울로 돌아왔다. 경제가 되살아난다는 기분 좋은 뉴스가 이어졌다. 글로벌 환율전쟁 때문에 G20 정상회의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럼에도 머나먼 타국에서 가슴 가득히 느꼈던 자긍심을 사람들 사이에서 찾기 힘들다. 치솟는 물가에다 입시전쟁, 취업난 등으로 우울한 분위기만 이어진다. 이러다 G20 참석을 위해 방한한 외국인들이 환하게 웃는 얼굴들을 볼 수나 있을지 걱정이다.

후일담 한마디. 지난 2월 열린 와튼스쿨의 학생회 선거. 한국계 대니얼 김이 당당하게 회장에 당선됐다. 1년 사이 한국의 위상은 이렇게 또 높아지고 있다.



홍주연 1999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2008년 미국유학을 떠났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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