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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종이돈 장난과 파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9호 31면

미국은 습관적으로 종이돈(불태환 화폐)을 악용했다. 금과 바꿀 수 없는 종이돈을 마구 찍어내 구멍 난 재정을 메웠다. 많은 나라가 한두 번씩은 비슷한 행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국만큼 상습적이고 체계적으로 종이돈을 악용해 먹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는 게 금융통화 전문가들 사이의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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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콘티넨털(continental)이란 종이돈을 찍어 독립전쟁 물자를 조달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가 발행해서 그렇게 불렸다. 콘티넨털은 말이 돈이지 차용증서(IOU)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남발됐으면 ‘not worth a continental(1콘티넨털만큼도 가치가 없는)’이라는 숙어가 만들어졌겠는가.

미국은 1861년 남북전쟁이 벌어지자 금과 태환되지 않는 달러인 그린백(Greenback)을 마구 찍어냈다. 종이돈의 뒷면이 녹색이어서 그렇게 불렸다는 게 정설이다. 재정적자가 커지면 종이돈을 찍어낸 미국의 버릇은 1970년대 초에 도졌다. 71년 8월 15일 미국은 금-달러 태환을 중단(닉슨 쇼크)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베트남전쟁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재정적자였다.

미국의 금태환 중단 선언은 금융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분수령이다. 이전 콘티넨털이나 그린백이 발행될 때는 미국에 양질의 화폐(태환화폐)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71년 금태환 중단으로 모든 달러 화폐가 종이돈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근대 기축통화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종이돈을 마음 놓고 악용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미국은 71년 이후에도 재무부 채권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동시에 달러 가치를 떨어뜨려 빚 부담을 줄였다. 그렇다고 미국이 달러 가치를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처럼 마구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자국 채권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팔려나가는 데 지장이 없는 수준에서 서서히 달러 가치를 떨어뜨렸다. 미 달러 가치가 채권자들의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어 떨어지면 채권을 팔아 먹을 수 없다.

미국이 콘티넨털이나 그린백을 악용할 땐 미국인이나 전쟁 특수를 노린 소수 외국인이 피해를 봤다. 그들은 쓰레기 같은 종이돈을 받고 전쟁 물자를 납품한 뒤 돈 가치가 떨어진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지금은 그 피해 범위가 훨씬 넓다. 달러 가치 하락으로 중국이나 일본·한국 같은 수많은 채권국이 피해를 보고 있다. 채권국은 미 재무부 채권의 만기에 액면 금액만큼 돌려받았지만 그 돈의 실질 가치는 빌려준 돈보다 적다. 미국이 기축통화국인 탓에 종이돈 남용이 낳은 피해가 글로벌화한 셈이다.

요즘 미국 달러 가치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외환 전문가들이 ‘유사 달러’라고 부르는 호주와 캐나다 달러와 일대일로 교환되는 수준(Parity)이 됐다. 22일 현재 미국 1달러는 1.01호주 달러, 1.02 캐나다 달러와 거래됐다. 미국은 금융위기 때문에 더욱 불어난 재정적자를 종이돈을 악용해 벌충하고 있다. 동시에 수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려고 한다. 미국은 빚 부담을 줄이면서 수출도 늘리는 일거양득을 노리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 같은 나라는 받을 돈 가치와 수출 경쟁력 하락이라는 이중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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