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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7) 국군 현대화의 초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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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공군은 1953년 휴전협정 조인 직전 국군 2군단 방어지역인 금성 돌출부를 향해 막바지 대공세를 퍼부었다. 백선엽 장군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맡아 중공군의 이 같은 막바지 총공세를 물리쳤다. 사진은 당시 중공군 포병의 모습. [중국 항미원조기념관]

중공군은 1952년 초까지 국군에게 두렵고 낯선 존재였지만, 약점이 있었다. 화력과 보급 부분에서는 역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두드리면서 기습과 우회, 매복과 포위를 벌이는 중공군의 전법도 우리가 그에 익숙해지면서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제는 마구 밀고 내려오는 병력 면에서의 압도적 우위였다. 그런 전법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물 밀듯이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의 머리 위에 화력을 쏟아붓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미군은 이 점에서 중공군에 두려운 존재였다.

 문제는 국군이었다. 화력이 부족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쳐들어오는 중공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단이 없었다. 그 점에서 2군단이 시범적으로 전선 너머의 중공군에게 2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던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국군에게도 자체적으로 조직한 강력한 포병단이 있다는 점을 저들에게 알린 것이다.

 나와 중공군의 끈질긴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당시 형성된 전선을 두고 남북으로 대치한 국군과 유엔군,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리한 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휴전협정 조인 직전까지 치열하면서도 처절한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나는 2군단장을 마치고, 육군참모총장을 맡아 마지막으로 중공군과 대규모의 싸움을 벌였다. 53년 7월 휴전 직전에 벌어진 금성 전투에서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2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어 중공군에게 국군의 역량을 과시했던 그곳에서 나는 1년여 뒤 다시 한번 중공군과 맞붙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언급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 전투의 의미는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싸움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3년여 동안 이어졌던 6·25전쟁에서 실질적인 아군 주력은 미군이었다. 한국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부족한 전투 경험, 낙후한 무기체계 등으로 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싸움을 벌일 수 없었다.

 그 뒤를 받쳐준 힘은 미국으로부터 왔다. 전쟁 직전 미군의 지원으로 국군은 M1 갤런드 소총을 지급받아 보병의 개인화기를 현대전 수행에 맞게끔 처음 갖췄다. 열악한 무기체계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나름대로 용맹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북한군에 이어 한반도에 뛰어든 엄청난 수의 중공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뒤에도 미군이 화력과 물자를 지원하면서 간신히 싸움을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중공군은 국군만을 노려 공격을 벌였고, 국군은 그런 중공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내가 2군단을 떠나고 휴전협정 조인을 코앞에 뒀던 53년 7월, 중공군은 30만의 대병력을 금성 돌출부 전선에 투입해 최후의 일격을 국군에게 가했다. 참모총장으로 대구에 있던 나는 국군의 모든 힘을 동원해 중공군의 그 마지막 총공세를 막아냈다. 국군이 막바지 중공군의 총공세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그 직후 벌어진 휴전협정 조인은 상당히 빛이 바랬을 것이다. 어차피 예정된 휴전이었지만, 중공군에게 자주 쫓겼던 국군으로 볼 때 그 전투에서마저 저들에게 패했다면 지금까지 심리적인 상처가 계속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군은 6·25전쟁을 통해 획기적으로 성장했다. 30만 명의 중공군을 맞아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해 결국 그들의 마지막 총공세를 물리쳤다는 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짧은 시간에 강군(强軍)으로 떠오른 대한민국 국군의 성장사(成長史)는 다음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어쨌든 2군단 창설 직후 중공군을 향해 벌인 거센 포격은 대한민국 국군의 용틀임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나도 2군단을 이끌면서 이 점이 자랑스러웠다. 물론 미군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자체적으로 보유한 포병단의 화력으로 중공군의 준동(蠢動)을 1년여 동안 잠재워버렸으니 말이다. 여러 사람이 2군단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국군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미군의 시스템이 한국군에 옮겨져 국군이 강군으로 커 나가고 있는 점은 미군에게도 자랑거리였다.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유엔군총사령관으로 부임한 클라크 장군을 비롯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클라크 장군의 친구인 영국 알렉산더 원수와 하딩 원수, 프랑스의 주앙 원수, 밴플리트 장군이 육성한 그리스군의 육군참모총장 등이 당시 2군단을 방문했던 귀빈들이다.

 미 9군단 참모진과 우리 2군단 참모진이 일대일로 5주 동안 함께 먹고 마시고, 배우고 묻는 과정을 철저하게 이수하면서 미군의 모든 시스템은 신속하게 국군에게 뿌리를 내렸다. 광주의 포병학교에서 치밀한 교육과정을 거친 국군 포병장교들은 2군단에서 실전 경험을 거친 뒤 각 지역의 사단에 배치를 받았다. 모두 17개 대대의 포병이었다.

 나는 귀빈들이 2군단을 찾을 때마다 그들 앞에서 이런 성과를 브리핑했다. 미군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영국과 프랑스·그리스의 고위 장성들은 놀랍다는 얼굴로 내 브리핑을 청취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 지닌 화력과 보급, 작전 능력 등 모든 시스템이 한국군에 아주 빠른 속도로 옮겨지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정신 없이 보낸 2군단 창설 과정이었다. 고생도 적지 않았다. 참모들과 천전리로부터 소토고미로 옮겨 허허벌판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던 모든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런 과정을 거쳐 현대화된 국군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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