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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이 아무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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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는 스스로 '이 아무개'라 한다. '나 여기 있소' 나서기를 저어하는 몸가짐이다. 이름 석자 내걸고 줏대 없이 흔드는 요즘 사람 같지 않다.

글을 써달라면 글을 써주고, 얘기를 해달라면 얘기를 해준다. 제 몸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아무 일도 안 하는 피리처럼 산다.

그는 한때 목사였지만 이제는 그래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다. 10년 전 공식적인 목회일을 접었다. 꽉 죄는 옷을 입은 듯 갑갑하고 답답해서였다. 누가 그에게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한마디한다. "울타리 없는 집에 산 지 이미 오래된 사람에게 언제 담을 넘었느냐고 물으시면?" 개종을 권하는 이에게는 이렇게 되묻는다.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왔다갔다하는 걸 이사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그는 요즘 어린이책 '콩알 하나에 무엇이 들었을까?'와 어른책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를 한꺼번에 펴내며 봄을 맞는다. '콩알…'는 새 학기, 새 학년, 새 시절이 시작하는 3월에 맞춤한 책이다. 콩알 하나에 하늘 기운.땅 기운.사람 기운이 들어 있으니, 밥을 먹는 것은 그 하늘 기운.땅 기운.사람 기운을 우리 몸에 모시는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소곤거린다. 어른이 읽어도 온몸에 봄 기운이 차오른다. 그가 왜 동화를 '가장 성숙한 문학'이라고 부르는지 알 듯하다.

'사랑 …'에서 독자는 마음의 봄을 만난다. 이슬람의 영적 스승인 루미의 글을 옮긴 것이지만 잠언 같은 짧은 글 뒤에 붙인 그의 느낌이 더 좋다. "생각들에 먹이를 주지 말고 굶겨라. 그것이 제대로 하는 금식이다." "아프냐? 참아라. 주인님께서 지금 당신 거울을 맑게 닦으시는 중이다."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무리는 아는 것 없는 '못난 자들'이 아니라 모르는 것 없는 '잘난 자들'이다." "하찮은 미물 앞에 고개 숙여라. 그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는 모든 경험을 꼭꼭 씹어 공손히 삼키면 은혜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의 맛에 혀를 길들이라는 목소리는 담담하다. 자신의 늙은 벗이자 맏형 같았던 장일순 선생의 가르침을 메아리처럼 전한다. "문자 공부로는 안 돼, 문자 공부에 빠지지 마라. 마음을 잡아, 마음을 항복시키라고."

충북 충주시 엄정면 들녘의 나지막한 산 밑에 엎드려 읽고 쓰고 생각하며 우리를 부르는 '이 아무개', 그의 이름은 이현주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